아침 8시에 진주에서 출발하여 12시 서울 도착, 2시에 서울에서 출발하여 오후 5시 30분 진주에 도착하는 일정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갈 때도 올 때도 차 안에서 자지 않았다. 올 때는 직접 운전했다. 휴게소엔 한번 들어갔다. 체력적으로 좀 힘든 상황이었다는 것을 미리 변명하는 것이다.
저녁 7시 30분에 약속이 있었는데 학원 간 아이는 7시 전에 온단다. 그럼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그래, 더운 날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은 아들을 위하여 맛있는 밥상을 차려 주자. 뭘 해줄까. 그래, 돼지고기와 김치, 감자를 잘게 썰어 넣은 볶음밥을 해주자. 얼마 전에 산 작은 뚝배기를 이용하여 달걀찜을 해주자. 입맛은 없겠지만 성의껏 한 마음을 알아주겠지. 그래.
달걀 두 개를 야무지게 풀고 양파 조금, 햄 조금, 대파 조금 넣은 뒤 물을 좀 타서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달걀찜’이라 적힌 단추를 누르면 전자레인지가 알아서 해준다. 5분 30초 걸린다. 그렇게 내버려두면 자동으로 다 되니까 참 좋다.
볶음밥 재료를 장만할 차례다. 냉동실 돼지고기를 약간 녹인 뒤 잘게 깍둑 썰었다. 감자 반 개와 양파 반 개도 같은 크기로 썰었다.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넉넉히 두른 뒤 대파를 볶았다. 식용유는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쥐어 짠 뒤 빈통은 버렸다. 대파 향이 거실에 퍼졌다. 대파 위에 돼지고기와 감자를 넣고 다시 볶았다. 잠시 후 양파와 스팸, 호박을 잘게 썰어 넣어 또 볶았다. 마지막으로 김치를 거의 같은 크기로 썰어 넣었다. 재료가 좀 많았다. 절반을 덜어 다른 통에 보관했다. 이제 아들만 오면 밥을 털어넣어 재료와 밥이 잘 섞이도록 하면 된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이윽고 아이가 왔다. 볶음밥을 준비했다 하니 좋아한다. 그러면서 “달걀도 얹어주세요!”라고 한다. 그렇지, 볶음밥엔 달걀이지. 아예 달걀 볶음밥을 해도 좋지. 하지만 지금은 이미 다른 재료가 모두 준비되어 있으니 달걀은 잘 구워 밥 위에 얹어주면 되겠구나. 그것쯤이야. 새 식용유 통을 꺼내어 뚜껑을 딴 뒤 팬에 두르고 달걀을 부쳤다. 그런데 웬걸. 달걀이 제대로 구워지지 않고 이상하게 되었다. 모양도 빛깔도 평소 보고 먹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무슨 까닭인지…. 새로 산 프라이팬이 아직 길이 나지 않아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잠시 후 아이에게 밥상 하나를 내민 나는 애비로서 역할을 다한 듯하여 매우 흡족하고 뿌듯했다. 이제 외출을 서두를 차례다. 그때 아이가 한 말. “아버지, 밥에 설탕 넣으셨어요?” “아니, 누가 볶음밥에 설탕을 넣어?” “그런데 왜 이렇게 달아요?” “그럴 리가 없는데. 단맛 내는 것이라곤 양파, 대파밖에 없는데….” “설탕 넣은 것 같아요.” “그래…. 그래도 먹을 만하긴 하니?” “네.” “그럼 됐다.” 나는 외출했다.
내가 아는 주방장 또는 요리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스스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불러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뜻) 조재경 송강식당 2대 주방장에게 이러저러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왜 그렇게 단맛이 나는 것인지 물었다. 뭐라뭐라 대답을 하긴 했는데, 정답은 아닌 듯했다. ‘그것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취하여 들어와 뻗었다. 여기까지는 어제, 그러니까 8월 4일의 이야기다.
토요일 오전 드러누워 텔레비전 영화 하나를 봤다. 아내는 밖에서 뭔가 아주 열심히 일했다. 점심시간 되어갈 무렵 “누가 올리고당을 내놨네!” 이러는 것 아닌가. 올리고당이라니. “전에도 올리고당을 내놨기에 내가 치웠는데. 나는 올리고당 안 써요.” “아니, 내가 어제 달걀 부치느라 새로 꺼냈는데, 그게 그럼 식용유가 아니었어?”라고 말하면서 나는 어제 아이가 밥 먹으며 “음식에 설탕 넣었는가” 물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뿔사뿔사 아뿔싸! 소사소사 맙소사! 럴수럴수 이럴수가!
아내는 새 식용유를 꺼내놨다. 카놀라유다. 내가 어제 사용한 건 올리고당이다. 빛깔은 식용유보다 노랗다. 먹어보진 않았지만 ‘당’이니까 달겠지. 아이는 설탕맛이라고 했지. 올리고당 병에는 ‘단맛과 흐름성이 좋아 설탕과 물엿 대신’ 사용하는 것이라고 돼 있기조차 하다. 나는 그게 올리브유인 줄 알았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루 만에 서울까지 왕복한 뒤끝인 데다 날씨마저 장난 아니게 더웠고, 또 약속 시간 맞춰 나가자니 정신 없지 않았나. 올리고당을 올리브유로 착각하긴 했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지 않았나. 그런저런 사정을 아이가 이해해 주겠지. 그건 그렇고, 아내는 분명 “전에도 올리고당을 내놨기에 내가 치웠는데”라고 했는데, 그때도 범인은 나였을 것이다.
비슷하게 생긴 병이 있다. 그 안에는 식용유가 들어 있을 수도 있고 올리고당이 들어 있을 수도 있으며 식초가 들어가 있을 수도 있고 물엿이 그 병 안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그러면 병에다가 커다랗게 식용유, 올리고당, 식초, 물엿이라고 써 놓으면 안 되나. 카놀라유, 해바라기씨유, 포도씨유라고 써놔야 하나. 이런 생각도 해봤다. 괜히….
2017.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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