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새벽잠을 흔들어 깨우는 도둑괭이들

by 이우기, yiwoogi 2017. 7. 6.

솟아오르는 분노와 터져나오는 짜증을 애써 참으며, 한숨을 수십 번 내쉬며 이 글을 쓴다. 머릿속이 멍하다.

 

새벽 4~5시 사이에 창밖에서 들려오는 고양이들의 울음소리 때문에 새벽잠을 설친다. 저녁 10~새벽 1시 사이에도 고양이들의 울음소리 때문에 쉬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다. 더운 여름날 창문은 열어놓을 수밖에 없고 그러자니 어쩔 수 없이 들려오는 그들의 흘레붙는 소리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우리는 2층에 산다.

 

화도 나고 짜증도 쏟아진다. 그대로 달려나가 작대기로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짱돌을 집어던져 그들의 대가리를 박살내고 싶은 생각도 꾸물꾸물 기어올라온다. 쥐약을 놓아 독살을 해버릴까 하는 상상도 해본 적 있다. 하지만 참는다. 괜한 가족들에게 화풀이를 하거나 혼자 길게 짧게 한숨을 쉬며 분노를 누른다. 스마트폰 라디오를 베개 위에 얹어 놓고 귀를 기울이다 겨우 잠들기도 한다. 이것마저 인격수양이다 생각하며 심호흡을 하기도 한다.


이 도둑괭이들은 나에게서 편안하고 안락한 수면을 훔쳐갔다. 쾌적한 거실에서 편안한 자세로 책 읽을 권리를 훔쳐갔다. 건강한 하루를 시작하기 위하여 나에게 주어진 수면과 휴식과 독서,그리고 가족과의 즐거운 대화를 훔쳐갔다. 내 몸과 마음속 어딘가에 들어 있을 착하고 선한 감정을 뺏어가고 나쁘고 사악한 감정을 드러내게 했다. 지은 죄가 한둘이 아니다.


고양이도 생명이다. 그들도 이 지구에서, 대한민국에서, 진주에서, 신안동에서, 우리 아파트 근처에서 암수가 만나 새끼를 치고 드러누워 가르랑거리며 놀고 쉬고 할 자유가 있다. 아파트 현관 밑에 둥지를 틀고 새끼들에게 먹이를 갖다 날라주며 한 생을 즐길 권리가 있다. 자기가 인간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것인지 아니면 그 정반대의 감정을 주는 것인지 그들이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을 것이다.

 

개를 키우는 아래층 아줌마는 고양이들에게 물도 주고 먹이도 준다. 사람을 알아보는지 아파트 현관 입구에서 그 아주머니를 기다리는 고양이도 있다. 몇 년째 그러고 산다. 어떤 주민들은 그런 고양이를 마치 자기 고양이인 양 귀여워하기도 하는 것 같다. 뭉툭한 꼬리, 상처 입은 등판, 날카로운 눈매, 씻지 않아 더러워진 털들을 보면서도 그들이 귀여운가 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미치겠다. 해마다 여름만 되면 반복되는 이 소음의 고통, 소음의 공해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정신이 돌 지경이다. 새벽 4시에 잠이 깨면 다시 잠들기 쉽지 않다. 5시에 깨어도 마찬가지다. 기분 좋은 꿈을 꾸다 깨어도 피곤하긴 마찬가지일 텐데 앙살스런 괭이 새끼들의 흘레붙은 소리 때문에 깨어난 아침엔 기분 참 나쁘다. 더럽다. 하루 종일 머리가 멍하고 기운이 가라앉기도 한다.

 

몇 해 전에는 멀리 내쫓아 버리기 위해 잠옷 바람으로 아파트 마당으로 내려간 적이 있다.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놈들에게 그보다 몇 배 더 강렬한 눈빛을 쏘아붙이며 멀리 쫓아버리고 돌아오면 땀도 나고 기분도 더러워져 잠은 더 달아나 버린다. 던지는 돌멩이를 요리조리 잘도 피하며 달아나는 그들을 보며 순간적으로 인간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력한지 깨닫는다. 그런 것을 이런 상황에서 깨닫는다는 건 또 기분 나쁘게 한다. 더 큰 문제는 불과 오 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그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다.

 

참을 인()이 세 개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하였다. 참자, 참자, 참자 하며 그렇게 살아왔고 이렇게 살고 있다. 요즘은 아파트 마당에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설치해 놓았기에 더욱 망설여진다. 미친 놈처럼 고양이를 쫓는 내 모습이 찍히는 것을 나는 원하지 않는다.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있다. 엎친 데 덮친 것을 말한다. 그렇게 고양이들이 생난리를 피우는 날 중 어떤 날은 옆집, 윗집, 아랫집에서 키우는 개들도 마구 짖어댄다. 아주 난리도 아니다. 도대체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는 것인지, 이러고도 계속 살아야 하는 것인지 근본적인 의문이 들기도 한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지만 귓속을 파고드는 괭이와 개새끼들의 불쾌한 오케스트라는 멈출 줄 모른다. 이러고도 미치지 않고 나름 멀쩡하게 살아가는 게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멀쩡함을 이렇게 진단 받아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참는다.

 

고양이들이 영역싸움을 하는지 흘레를 붙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내는 소리는 엄마 아빠 없는 불쌍한 아기가 배고파 죽겠다며 내지르는 울음소리와 비슷하다. ‘모골이 송연하다는 말을 흔히들 쓰는데 이럴 때 씀 직한 말이다. 이 말은 ‘(사람이) 몸이 옹송그려지고 털끝이 쭈뼛해질 정도로 아주 끔찍하다는 뜻이다. 이런 것을 참고 견뎌야 하나.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나날이 계속되다 보면 내 목숨이 단축되는 것 아닌가. 정말 내가 헤까닥 돌아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떻게 해야 하나.

 

201511. 어떤 사람이 동네에서 어슬렁거리며 쓰레기봉지를 뒤지는 고양이에게 활을 쏘아 동물을 학대했다고 잡혀간 적이 있다. 동네방네 뉴스에 다 나왔다. 대부분 그분을 비판하는 논조였다. 나는 그분의 마음을 백프로 이해한다. 오죽하면 그렇게 했을까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말도 할 줄 모르는 동물에게 너무한 것 아니냐 하겠지만, 그렇게 말도 할 줄 모르고 사람의 보살핌이 없으면 동네 쓰레기봉지를 뒤질 수밖에 없는 고양이를 내다버린 자는 누구더란 말인가. 자칭 동물보호단체나 동물애호가인 양하는 사람들은 과연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가 묻고 싶었다.

 

어릴 적 시골에 살 때 개도 키우고 고양이도 키웠다. 키운다는 것은 먹이를 책임져 준다는 것이다.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 준다는 말이다. 죽으면 묻어주겠다는 뜻이다. 개는 진주로 이사올 때 딴 집에 팔았는데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울었다. 고양이는 우리가 이사하던 전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에 태우고 오려고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그 고양이는 주인 잃은 불쌍한 도둑괭이가 되어 우리집 뒤 대밭 사이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생을 마감했을까. 아니면 남의 집 담벼락을 넘고 부엌을 뒤지다 부지깽이에 맞아 줄행랑을 놓으며 구차한 생을 이어갔을까. 알 수 없다.

 

요즘은 길고양이라고들 한다. 잘 지어낸 말이다. 일정한 거처가 없이, 그러니까 주인도 없이 길거리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고양이들을 가리킨다. 도둑고양이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다정해 보이고 귀여워 보인다.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챙겨주는 분도 있고 잘 꼬셔서 데려다 키우는 분도 있다. 어떤 분은 수십 마리 고양이와 함께 어울리며, 그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면서 살기도 한다. 고양이 관련 책도 수십, 수백 종 나와 있다. 예쁘게 사진을 찍어 총천연색으로 펴낸다. 그분들은 돌아가시면 분명 저승에서 고양이 왕국에서 복받으며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고양이 때문에 내가 미칠 지경이다. 고양이들을 안면방해죄로 고소할까, 그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무책임한 사람들을 고소할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지자체나 동물보호단체에서 도둑고양이들을 잡아들여 더 이상 새끼를 낳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은 없을까. 법을 만들어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개들을 하나하나 등록하게 하고 병 걸렸다고, 이사 간다고, 귀찮아졌다고 내다버리지 못하도록 하는 건 어떨까. 어차피 지구라는 행성에서 함께 살아야 할 동물들 사이인데 서로 피해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할 방법은 정녕 없을까.

 

2017. 7. 6.

'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북정에서 거북처럼 엎드리다  (0) 2017.07.10
지금, 내가  (0) 2017.07.10
깨진 밥그릇  (0) 2017.06.28
시내버스 이용하기(1)  (0) 2017.06.27
함양 이모  (0) 2017.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