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은 잘 모르겠는데, 초등학교에 입학이라도 해 본 사람은 이른바 ‘국민의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눈망울 초롱초롱한 아이들을 꽃샘바람 부는 운동장에 모아 놓고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순으로 5분 가량 진행한다. 참 다행스럽게도 애국가는 대부분 4절까지 제창하지 않고 1절만으로 갈음해 준다. 4절까지 다 외우는 사람도 많지 않겠지만. 아무튼 콧물 흘리며 애국가 부르던 시절들 다 기억할 것이다.
3ㆍ1절이나 광복절 같은 국가기념일에 국민의례는 아주 중요하다. 내가 소속한 기관에서도 시무식, 입학식, 개교기념식, 졸업식 같은 중요 행사를 할 때는 반드시 국민의례를 한다. 손님을 모셔 놓고 하는 공식행사에서는 빠뜨리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부족하면 국기에 대한 경례만으로 갈음할 때도 간혹 있다. 이런저런 뒷말도 많은데, 간혹 높은 사람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 오른손을 왼손 ‘가슴’에 대지 않고 ‘똥배’에 대고 있다가 구설수에 오르기도 한다. 국기에 대한 경례 도중 전화하는 정치인도 있었고 왼손을 오른쪽 가슴에 올린 축구선수도 있었다.
현재 국민의례는 2010년 7월 27일 대통령훈령 제272호에 따라 진행된다고 한다. 국민의례는 각종 공식적인 의식이나 회의 또는 행사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기에 대한 예를 표하고, 애국가를 제창하며,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하여 예를 갖추는 일련의 격식을 말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국민의례는 “1941년 일본기독교단에서 정한 의례양식-구체적으로는 ‘궁성요배, 기미가요 제창, 신사참배’ 등으로 이루어진 의례이다-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국민의례가 국가주의를 조장하고 강요한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이다. 국민의례는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하는가 보다.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 낭독하던 맹세문의 내용이 조금 바뀌었다. 이전에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였다. 지금은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로 바뀌었다. ‘조국과 민족’이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으로 바뀌었고 ‘몸과 마음을 바쳐’가 빠졌다. 근본적인 뜻은 바뀌지 않았겠지만 문맥을 보면 많이 부드러워졌다. 훨씬 공감할 만한 내용이다.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을 할 때는 잔잔하고 엄숙한 음악이 흐른다. 음악이 끝나는 시점을 잘 모르고 있다가 아직 음악이 끝나지 않았는데 “바로!”라고 외치는 사회자가 간혹 나온다. 엄숙한 순간에 웃지는 못하고 속으로 키득거리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국민의례는 끝나고 자리에 앉게 된다.
여기서 순국선열은 무엇이고 호국영령은 또 무엇인가. 뭉뚱그려 말하면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선조들일 것이다. 순국선열이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은 윗대의 열사(烈士)’이고, 호국영령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명예로운 영혼’이니까. 내가 보기엔 그게 그것 같다.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순국선열의 날은, 대한제국의 국권이 실질적으로 침탈당한 을사조약(1905)이 늑결(勒結)된 날인 11월 17일을 전후하여 많은 분들이 순국하였으므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현재의 순국선열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제정하였다고 한다. 호국보훈의 달은 아마 6ㆍ25 한국전쟁이 터진 달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제정한 것 같다.
새해 초 이런 기사를 보았다. 정부는 국민의례를 할 때 ‘세월호’, ‘5ㆍ18’ 등과 관련한 묵념을 못하도록 못 박았다. 대통령 훈령을 개정하여, 묵념을 할 때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만을 대상으로 삼고 나머지 다른 명분이나 이유로 추모(묵념)의 대상을 임의로 추가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동안 공식 행사가 아닌 경우 보통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말고도 이런저런 내용을 넣어 왔던 게 사실이다. 가령 국기에 대한 경례가 끝나면 사회자가 “다음은,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 그리고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하여 희생한 영령들께 묵념을 올리겠습니다”라고 하거나 어떤 민간기업에서는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 그리고 우리 회사의 창업주를 비롯하여 회사발전에 기여하시다 먼저 가신 선배님들께 묵념을 올리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조금씩 변용하여 온 것이다. 동문회 행사에서는 동문 선배들에게 묵념을 끼워넣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이를 보도한 언론 기사는 “이로써 가령 세월호 참사 희생자는 사실상 국가행사는 물론, 일선 학교 행사 때도 추도하기 어려워졌다. 국민을 통제하고 가르치려는 국가주의적 발상인데다,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 때 대통령 훈령을 개정, 시행한 게 타당하냐는 지적이 나온다”고 지적했다. 행자부 쪽에서는 “특정 묵념을 반대하는 참석자가 있을 수도 있어 국론분열을 막자는 취지로 개정했다”고 한다는데,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진다.
내 생각은 이렇다. 정부에서 국민의례의 기본적인 절차와 내용을 지정하여 주는 것은 옳다고 본다. 이러한 의례 자체가 국가주의를 조장한다는 비판도 경청해 봐야겠지만, 일단 그것까지는 따지지 않기로 한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하여 묵념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도 일단 좋다. 어쨌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내가 이렇게 밥먹고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까, 그 감사함에 묵념을 드리는 것은 옳다. 정부에서 할 일은 여기까지다.
그 외에 가령 안산시나 안산지역 교육기관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거나, 광주에서 5ㆍ18 희생자를 추모하거나, 제주에서 4ㆍ3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은 자율에 맡기면 된다. 어떤 민간기업에서 창업주 또는 회사 발전을 위하여 희생한 선배나 동료를 추모할 수도 있겠다. 학교에서도 일생을 후세 교육에 매진하다가 퇴직한 뒤 돌아가신 선생님을 추모할 수 있겠다. 국가기념일이라도 가령, 한글날이라면 순국선열도 아니고 호국영령도 아닌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님들께 대한 묵념’을 더 추가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싶은 것이다. 만약 경남도청이라면 ‘경상남도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신 역대 도지사와 수많은 도민을 위한 묵념’을 더 넣을 수도 있지 않을까.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이후 민주화를 위하여 싸우다가 억울하게 희생당한, 또는 스스로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내던진 사람들도 국민의례에서 추모할 수 있다고 본다. 국가 공식 기념행사에서도 마침 전직 대통령이 최근 돌아가셨다면 그 분을 추모하자는 말 한마디 끼워넣음직 하지 않겠는가. 그것까지 막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정부는 ‘국론분열’ 운운했다. 반대로 국민의례를 야무지게 잘 치른다고 국론이 통합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국론이란 이러한 의례로 통합되는 게 아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에 나왔듯, 우리나라가 정말 ‘자유롭고 정의롭다’고 여길 때 스스로 발현되는 것 아닌가. 애국심도 그러한 상황에서 생겨나는 것 아닌가. 국격이라는 말도 우리나라가 국내외적으로 자유롭고 정의롭다는 믿음을 가질 때 입에 올릴 수 있는 말 아닌가. 요즘처럼 비선실세가 국정을 농단하고 세계적 기업이 기업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청와대를 개입시킨(또는 청와대가 이 기업을 개입시킨) 뇌물스캔들에 휘말려 있다면 누가 국격을 논하고 누가 애국심을 말하고 어느 누가 국론 통합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기 어려운 이 지경에.
국민의례 시간에 세월호를 추모하고 5ㆍ18을 기린다고 하여 국론이 분열될 것도 아니라고 본다. 정부에서 5ㆍ18을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 인정했지만 아직도 그 사건은 남파간첩에 의한 조작 사건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정신 나간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여 국론 분열 운운한다면 그것은 언어도단이다. 세월호와 관련하여서는 여러 가지 의혹이나 문제를 떠나 한 날 한 시에 이승을 하직한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잠시 묵념해 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잠시 다짐하는 게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추모를 하라고 독려하지는 못할망정 하지 말라고 가로막을 일은 더욱 아니라고 본다.
기관이나 단체마다 국민의례를 할 때 그 기관이나 단체의 성격에 맞게 이런저런 추모의 문구를 추가하여 국민의례를 해도 될 것 같다. 아무 문제 없다. 정부에서 그것을 뜯어말릴 까닭이 없다. 그것이 국가를 부정하고 정부의 방침을 거스르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그럼으로써 그 기관이나 단체 소속 구성원들이 마음으로 더 강하게 통합될 것이고, 그리하여 그 기관이나 단체가 더 잘 발전해 가는 데 힘이 될 것이다. 만약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참석하는 큰 행사에서 국민의례 시간에 개별적으로 추모(묵념)의 문구를 넣지 못하게 한다면, 그런 추모의 정을 나타내기 위하여 소속 구성원들을 다른 날에 따로 불러모아야 할 것이다. 이건 시간 낭비요 에너지 낭비다. 이런 일로 자꾸 오라가라 하느냐 하는 불평불만도 나올 것이다. 이건 길게 보면 국론분열로 가는 전조 현상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태극기에 경례하고 애국가 부르며 순국선열에 고개 숙이던 우리나라 국민의 의식이 나이 스물, 서른, 마흔 넘어서도 여전히 코흘리개 수준에 머물러 있을 것으로 보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발상이 나올까 싶은 것이다.
2017.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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