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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청년문학회 추억

by 이우기, yiwoogi 2016. 1. 31.



군대에서 전역하던 1991년 봄에 진주청년문학회에 가입하였다. 진주청년문학회는 1989123일 창립하여 처음에는 다달이, 어떤 때는 두 달에 한번, 나중에는 아예 두 달에 한번씩 회보 <청년문학>을 발행하였다. 회보는 진주시내 커피숍서점을 통하여 시민들에게 무료로 배포하였다. 회원들은 당시 진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남도시 동인, 경상대 국어국문학과와 울력문학회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울력에 몸담았던 나는 자연스럽게 진주청년문학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학생으로서는 유일한 회원이었다. 선배들이 꼬시긴 했지만 그러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찾아갔을 확률이 높다. 처음 창립할 때 일은 잘 모른다. 창립취지는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문예운동을 활성화하여 민족 민중 문학운동을 계승 발전시키는 한편 민족통일과 인간해방을 위한 전체 활동에 복무해 나감에 그 목적을 둔다고 돼 있다. 좀 거창하다.

 

<청년문학> 10(19918)를 낼 때부터 편집일을 돕기 시작했다(창간은 19903). 합평모임에 나온 작품을 모으고 도서출판 형평에서 편집하면 교정보고 인쇄한 회보를 당시 선다원희다원진주문고 같은 데 갖다 놓는 일을 했다. 많은 시민들이 후원회원이 되어 인쇄비를 보태주었다. 그러다가 1995년에는 회장이 되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그사이 지리산 거림계곡, 사천 서포, 고성 문수암 등지로 놀러도 다녔고 당연히 술을 많이 마셨다. 나이 많은 선배들에게서 많이 배웠고, 새로 들어오는 신입 회원들과도 잘 어울렸다. 합평회를 한 뒤 이어지는 술자리에서도 문학과 사회, 역사, 지역에 대한 이야기들을 토론하고 논쟁하느라 항상 진지했고 열정이 넘쳤다. 초대회장은 나보다 꼭 10살 많았는데 말 그대로 생각도, 실천도 청년다웠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활동하던 전북청년문학회와 교류하기도 했다.

 

진주청년문학회는 진주지역 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행사에서 연대시를 낭송하거나 벽시를 전시했다. 초대회장 김석봉은 199010월 시집 <이 세상은>을 냈다. 노동자 가을문화제에 참여하기도 했고 지역민과 함께하는 독서토론회를 두 번 열었다. 진주지역문화예술연합(진문련) 건설 제안서를 발표해 진문련 창립에 도화선이 되었다. 12월 창립 두 돌 행사를 끝으로 실질적인 활동은 좀 시들해졌고 회보도 제12호로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1993년 진주청년문학회 재창립 논의를 하게 되었고 그해 5문학을 통하여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변혁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을 내걸고 재창립에 성공하였다. 회보 제13호는 19938월에 냈다. 그사이에 이순수 회원은 장편소설 <섬진강>을 냈다.

 

나는 주로 콩트, 단편소설, 독후감, 영화감상문 따위 글을 썼다. 찾아보니 <주초고사 없는 월요일>, <푸른기와집 2>, <이발소 이야기>, <밭은기침>, <두부집 이야기>, <칫솔과 비닐>, <변두리 이야기2-섭천댁>, <쥐잡기>, <알몸으로 서 있기>, <푸른기와집 4>, <고구마순>, <, 밥값, 바람>, <속물>, <마이클과 황신혜>, <신용카드 써먹기>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지금 보니 낯이 화끈거리지만 그때는 열정이 있었다. 작품을 내놓으면 잘 썼다고 칭찬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잘못된 점을 잘도 지적해 주었다. 꼭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때는 너무 고마워 울었고, 또 어떤 때는 서운하여 울기도 했다. 술에 취하여 버스 타고 또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진주청년문학회는 1995년에 <변하는 모든 것은 당당하다>(도서출판 먼동, 258)라는 작품집을 펴냈고, 1996년에는 <눈부신 맨몸으로 남으리>(도서출판 먼동, 119)라는 작품집을 펴냈다. 두 번 다 경남도에서 주는 문예진흥기금을 지원받았다.

 

해마다 회장이 바뀌었고 새로운 회원이 들어왔다. 정식으로 등단하여 작가가 된 회원도 나왔다. 그러나 파릇파릇하던 20대 청년들은 30대가 되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40대를 넘어가는 회원들은 먹고사는 일이 더 중요해졌으며, 무엇보다 문학으로 사회 변혁에 이바지한다는 것의 중요함에 비하여 우리의 역량은 부족하여 모임은 다시 침체기를 맞이하였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2000년 말 회보 제41호를 끝으로 진주청년문학회 활동은 중단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해산을 선언한 것은 아니므로 진주청년문학회가 없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198912월부터 대략 11년 동안 진주청년문학회는 나에게 문학도로서 꿈을 키워나가는 학교였고, 선후배들과 사랑과 정을 나누는 놀이터였으며, 우리 사회와 역사를 똑바로 바라보게 하는 사상의 은사 같은 곳이었다.

 

진주청년문학회 회원들은 지금도 우리 지역 곳곳에서 자기 일 열심히 하며 틈틈이 글을 쓰면서 산다. 한번이라도 회원이던 사람들 이름과 얼굴을 모조리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많은 회원들은 지금도 자주 만나 술 마시며 떠들고 논다. 문학으로부터는 좀 멀어졌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완전 비문학인이 된 것도 아니다. 문학은 늘 우리의 밥이고 술이었으니까. 사회관계망서비스 덕분에 예전보다 쉽게 연락하고 만나고 논다. 아쉽고 안타깝게도 아예 연락이 끊어진 회원도 제법 있다. 지금 이름만 들어서는 같은 시기에 문학활동을 함께 했다는 사실조차 가물가물한 사람도 있다. 그냥 선후배로 아주 친한 친구처럼 지내는데, 이제 와서 확인해 보니 진주청년문학회 회원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런 진주청년문학회 회원들 열한 명이 실로 15~16년 만에 모였다. 부산, 창원, 거제, 진주에 있던 사람들이 함양 마천에서 살고 있는 초대회장 댁으로 달려간 것이다. 이들 가운데 정말 10여 년만에 만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내 기준으로는 그렇다. 기별은 닿았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함께하지 못한 회원도 있고, 옛날 전화번호밖에 없어 기별할 방법이 없는 회원도 있었다. 아무튼 진주청년문학회 활동이 중단된 뒤에도 이런저런 자리에서 만나곤 하던 사람들이 지리산 아래에 모여 옛 추억을 더듬었다. 12일 동안 옛 회보와 사진을 꺼내놓고 와하하, 까르르 웃고, 마천흑돼지 안주 놓고 잔을 부딪히며, 그때 부르던 노래도 몇 곡 불렀다. 앞으로 한번씩 어떻게든 모여보자는 의논이 자연스럽게 오고갔고, 어쩌면 가을에 거제 또는 함양에서 모이게 될 듯하다. 11년 동안 펴낸 회보를 죄다 모아서 영인본을 만들기로 했고, 새로운 작품을 한 편씩 써서 <청년문학>을 다시 펴내보자는 의견도 있었다.

 

친하던 친구라도 몇 년만에 만나면 어색하고 데면데면해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진주청년문학회 회원들은 그런 것 없이 그냥 그대로 하나가 되었다. 다들 기억하고 있는 사건, 사고, 일화 등을 하나씩 이야기할 때마다 집천장이 날아가라하고 박장대소하였고 형님, 동생 하며 어깨동무하니 20년 전으로, 15년 전으로 우리는 돌아가 있었다. 초대회장 나이 예순 살, 내 나이 쉰 살. 생물적 나이는 청년이라고 하기 어렵겠지만, 우리들의 눈빛, 우리들의 가슴, 우리들의 생각은 청년 그대로였다고 감히 자부한다. 그렇게 12일을 보내고 돌아왔다. 바쁜 사람은 먼저 돌아갔고, 아쉬움을 떨쳐내지 못한 사람은 진주로 와서 뒤풀이를 알뜰히 하고 헤어졌다. 진주청년문학회, 이 일곱 자 이름에 담긴 것들, <청년문학>, 이 회보들에 담긴 것들 하나하하 꺼내놓고 펼쳐놓고 보니, 흐뭇하기만 하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인생에서 행복이요 기쁨이요 보람이다. 그것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삶 자체이다. 돌이킬 수 없고 되돌아갈 수도 없지만, 그때 그 정신과 마음으로 살아가자고 스스로 다짐해 본다. “진주청년문학회여 영원하라고 외쳐본다.

 

2016. 1.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