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까지는 잘 몰랐는데,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유행한 말이 ‘전해라’였던가 보다. 보통 유행어는 희극인이나 배우들이 만들고 때로는 광고에서 나오는 건데, 유행가에서 유행어가 나왔다. 어찌 보면 제대로 된 것 같다. 12월 말쯤 ‘전해라’라는 가사가 나오는 노래 ‘백세인생’을 들어보았다. 가사는 단조롭고 쉬웠다. 그런 한편으로는 마음이 찡했다. 유행어가 될 만하다 싶었다.
‘전해라’라는 말을 가만히 곱씹어 본다. ‘전해라’는 어떤 상황에서 쓰는 말인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싸움을 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생겼다. 아들에게 “엄마한테 내일모레 아버지 출장 간다고 전해라.” 이러겠지. 아들이 그 말을 어머니에게 전했다. 어머니는 “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라고 전해라.” 이런다고 치자. 중간에 왔다 갔다 하는 아들은, 겉으로 말은 못해도 ‘참 너무들 하시네. 안방, 건넌방에 계시면서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지 않고!’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래도 아들이 중간에서 곧이곧대로 잘 전해주니까 괜찮다고 할 수 있다. 아들이 소통 통로이다.
사또가 이방에게 “고을 백성들에게 아무 날 아무 시까지 오면 쌀 한 말씩 준다고 전하렷다!”라고 했는데 이방이 중간에 쌀을 가로챌 생각으로 “아무 날 아무 시에 오면 쌀 닷 되씩 준다.”고 했다고 치자. 문제가 생기겠지. 거꾸로 백성들이 “사또는 백성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그러지 않으려면 물러나라!”고 했다고 하자. 그런데 이 말을 전해야 할 이방이 자기가 꾸지람 들을까봐 못 들은 척했다고 하면 어찌될까. 나중엔 화난 백성들이 관청으로 우르르 몰려가겠지. 이방은 소통의 역할을 팽개친 죄를 받겠지.
대통령이 뭐라고 하면 그 말을 받아서 국민에게 전하는 건, 오늘날에는, 언론이다. 국민들이 뭐라고 하는 걸 받아서 청와대에 전하는 것도 역시 언론이다. 언로는 늘 트여 있어야 하고 간섭당하지 말아야 하며 특히 누구든 본질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언론은 민주주의를 만들고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장치이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신문이 없는 정부와, 정부가 없는 신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후자를 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언론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언론이 정부와 국민 사이의 소통의 기능을 잘하면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된다.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사또나, 백성이나, 대통령이나, 국민이나 모두 하나같이 아들에게, 이방에게, 언론에게 “뭐라고 전해라.”라고 하면 끝인가 생각해 본다. 과연 그렇게 ‘전해라’라고 해 놓으면 그것으로 끝일 수 있는가 싶어진다. 중간에서 전해야하는 말 즉 전언(傳言, 메시지)을 제대로 전하고 있는지, 그리하여 그 결과가 제대로 실천(실현)되는지 확인해야 할 책임은 맨 먼저 전하라고 말한 사람에게 있는 것 아닌가. 만약 제대로 전달하지 않으면 아들이든, 이방이든, 언론이든 잡아 족쳐야 한다. 한편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전하라’는 이 말 속에는 “나는 전하라고 했으니 내 책임은 다 한 것이다.”라고 하는 책임회피의 심리가 도사리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진다. 메시지를 전달받아야 할 사람과 그리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당장 만나 면전에 대고 이야기함으로써 원활하게 소통할 수도 있는데 애써 그러하길 회피하는 게 아닌가 싶어지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그래, 좋게 말하자, 사또가 백성을 직접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고, 사장이 말단직원을 직접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대통령이 국민을 직접 만나지 못할 까닭이 없다. 그런데도 그런 것은 외면한 채 ‘전하라’고만 외치고 있는 것 같다. 조선시대에는 신문고라는 게 있었다.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고자 할 때 치도록 대궐 문루(門樓)에 달아 두었던 북이 신문고(申聞鼓)이다. 백성이 이방에게, 이방이 사또에게, 사또가 그 위 누구에게, 또 누구가 임금에게 억울함을 하소연해도 도무지 소용 없으니 백성이 직접 이 신문고를 울리도록 한 것이다. 조선시대 신문고가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이 있다고 할 것인가.
‘전해라’가 유행어가 된 것은 어쩌면 소통이 안 되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병리현상이 반영된 것 아닐까 싶다. 나는 분명히 누구에게 뭐라고 전하라고 했으니 내 책임은 없다고 하는 심리. 직접 당사자와 마주앉아 토론하고 논쟁하여야 하는 상황인데 그렇게 하는 것은 귀찮고 두려워서 피해가고 싶어 하는 심리. 대중의 생각을 윗사람에게 제대로 전해야 마땅한데 그렇게 했다가는 외려 내가 호통을 들을 것만 같아 모르는 척 해버리는 심리. 이런 것이 뒤섞여 있는 것만 같다. ‘전해라’라는 유행어는, 노래를 부른 가수에게는 미안하지만, ‘전해라 증후군’ 즉, 병적 증세로 불릴 만하다.
이야기가 엉뚱한 데로 흘러갔다. ‘백세인생’ 가사를 한번 음미해 본다. “육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칠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팔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구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전해라. 백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이 말을 저승사자에게 전해줄 메신저는 누구인가, 문득 궁금하다. 사람의 말을 귀신에게 전할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칠십 세 즈음에 정말 저승사자를 만났는데 “그때 내가 분명히 그렇게 전해라고 했는데. 할 일이 아직 남았으니 못 간다고 전해라고 했는데…그 말 못 들으셨어요?”라고 말할 것인가. ‘전해라’가 유행어가 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곰곰 생각해 보니 씁쓸한 마음 지울 길 없다.
2016.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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