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대학 2학년 초여름으로 기억한다. 일요일인데 선배 한 분이 나를 찾는다. 망경동 진주교 입구 남강나이트에서 무슨 정치 행사를 하는 데 가보잔다. 별일도 없던 터라 무슨 행사를 어찌 하는지 궁금하여 따라나섰다. 시내 쪽 진주교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이 많았다. 경찰들도 출동하여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선배는 “김영삼이 온다.”고 했다. “꼭 악수를 해야 한다. 그러니 뒤에 꼭 붙어 있으라.”고 했다. 무슨 종이 쪼가리를 나눠주고 곳곳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박수소리, 함성소리도 들렸다. 나와 선배는 입구 쪽에 딱 버티고 서서 뒤로 밀리지 않으려고 장딴지에 힘을 주고 있었다.
한참 지난 뒤에 저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규칙적인 구호가 들려왔다. “김영삼!”을 외치는 소리였다. 수많은 건장한 사람들에 둘러싸인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났다. 자리를 잘 지킨 덕분에 김영삼과 악수를 할 수 있었다. 악수라기보다 손과 손이 스쳐지나갔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1초도 되지 않은 짧은 순간이지만, 보들보들했던 감촉이 내 손에 남았다. 기억의 창고에 저장되었다. 그는 키도 크지 않았다. 저렇게 여린 손과 작은 체구로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용기와 기백이 어디에서 나올까 싶었다. 그런 한편으로 그가 걸어온 정치적 역정은 고난과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근본 태생은 부잣집 도련님이겠구나 싶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저런 인연으로 인하여 나는 당시 여당이던 민주정의당보다 야당을 더 지지하는 정치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 옥봉성당에서 본 광주항쟁 비디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1987년 국민들의 투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였다. 김대중, 김영삼은 둘 중 한 명이 12월에 열릴 대통령선거에 후보로 나갔으면 반드시 노태우를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국민의 한결같은 여망을 외면한 채 둘 다 후보로 출마하여 결국 선거에서 졌고, 전두환 군부독재자의 친구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국민들은 실망하였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권력욕의 화신이 되게 하였는지 모르겠다. 후보단일화를 외치는 국민들의 간절한 호소를 끝내 모른 척한 그들 둘은 우리나라에 민주화를 앞당길 기회를 날려버린 우를 범하였다.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 그것까지는 나는 이해한다. 둘 다 출마만 하면 확실하게 당선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고, 착각은 자유이니까.
내가 기억하는 것 중 가장 비열하고 안타까운 것은 그다음에 일어난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1990년 2월 당시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을 해버린다. “호랑이를 잡기 위하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말로 변명했지만 내가 보기엔 태생이 부잣집 도련님인 그가 무슨 짓을 저질러서라도 대통령이 되고 싶은 자기 욕심을 가장 비겁하고 개 같은 방법으로 달성하기 위해 국민과 역사를 배신한 것일 뿐이었다. 신군부 전두환, 노태우와 민주투사 김영삼, 그리고 신군부로부터 부정부패 세력으로 낙인찍힌 김종필의 야합이다. 평생 박정희 군부독재에 저항하며 민주투사로 살아온 김영삼이 하루아침에 군부독재의 품에 퐁당 안겨버린 것이다. 국민들은 배신감으로 욕을 뱉었고 김영삼이 키워온 대다수 정치인들은 그를 따라갔다. 노무현 등 몇 명만 남았다.
나는 이 야합을 보면서, 이제 우리나라 정치에서 배신이니 야합이니 하는 말은 더 이상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똥을 처먹고도 끽 소리 못하던 사람들이 겨를 먹은들 별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김영삼이 노태우 정부에 대항하여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한 투쟁을 벌여 ‘선거에서’ 이겨 대통령에 당선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거혁명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정권을 잡음으로써 평생 민주화 운동을 해온 자신의 인생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자신을 믿고 지지하던 국민들에게도 희망이 어떻게 현실이 되는지를 증명하여 주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대이고 가정이다. 그랬더라면 역사에 더 훌륭한 이름으로 기록되었을 것이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도 더욱 단단하게 정착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은 가장 나쁜 선택을 하여 대통령이 되는 길로 걸어갔다. 그가 일생동안 걸어온 민주화의 길을 배신하고, 그의 눈빛 하나 손짓 하나 말투 하나에 기대를 걸고 열망을 보내던 국민들을 한순간에 바보로 만들고 말았다. 이보다 더한 배신은 다시없을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민자당은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지금은 새누리당이다. 김영삼은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였고 군부대 내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했다. 인기가 높았다. 대통령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아도 된다고 하여 권위주의를 해체하는 데 기여했다. 평생 이를 갈며 기다려온 민주적 조치들을 하나하나 해나갔다. 그러나 임기 말에 국가부도 사태를 불러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둘째 아들이 부정을 저질러 감옥을 갔다.
한 정치인이 일생을 마감하면 공과 과에 대하여 말들이 많게 된다. 누구든 긍정적이기만 한 인생을 살 수도 없고 반대로 욕먹을 짓만 하면서 인생을 살지도 않는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또는 전략적으로 법의 경계를 넘기도 하고 배신도 하고 음모와 모략으로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가 죽고 난 뒤에는 공이 큰지 과가 큰지 평가받게 될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우리 국민에게, 우리 정치사에 국민과 역사와 자기 스스로를 배신하고도 결국 대통령이 되기만 하면 용서받고 인정받게 된다는, 못된 선례를 남겼다. 많은 치적에도 불구하고 나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 내가 점수를 더 준다고 좋아하고 덜 준다고 서운해 할 사람 아무도 없지만. 명복을 빈다.
2015.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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