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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대한 내 생각

특별휴가보다 평화를 바란다

by 이우기, yiwoogi 2015. 9. 21.

대통령이 추석을 맞이하여 장병 56만여 명에게 12일 특별휴가를 주기로 했다고 한다. 84일 서부전선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 사건, 뒤이은 포격 도발로 인하여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고 모든 국군 장병들의 외박은 물론 휴가까지 금지됐었는데, 그때 몇몇 장병들은 전역까지 미루며 위기상황을 함께했다고 한다. 그에 대하여 대통령으로서 치하하는 것이라고 한다. 격려 카드와 특별 간식도 지급된다고 한다. 특별휴가증은 부사관은 1년 이내, 병사들은 전역 전까지 본인이 원할 때 개인 휴가를 연장하는 데 사용할 수 있게 되며, 67만여 명의 군인 가운데 56만여 명의 장병들이 혜택을 보게 된다고 한다.

 

군대시절로 돌아가 본다. 강원도 인제군 원통 민통선 안에서 군생활을 했다. 남자들만 득실대는 군대는 감정이 메마르고 정서는 고갈된다. 꽉 짜인 일정 속에서 시계 바늘만 바라보며 톱니바퀴처럼 살아간다. 살아간다기보다는 살아낸다고 하는 게 더 맞을지 모르겠다. ‘견뎌낸다고 할까. 몸은 늘 피곤하고 잠은 늘 모자라고 배는 늘 고프다. 정신은 피폐해지고 육체는 딱딱해진다. 그야말로 전쟁 중이다. 그럴 때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을 받고 정신적으로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은 휴가, 위문공연, 피엑스 등이다. 그중 휴가는 단연 최고의 선물이다. 몇 달 동안의 고통과 고독을 한 번에 만회해줄 특급 선물이다. 훈련을 하면서, 이런저런 작업을 하면서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을 싸잡아 욕하다가도 그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이 던져주는 휴가증 하나에 모든 나쁜 감정이 일시에 씻겨가곤 했다. 마취된다고 할까 세뇌된다고 할까.

 

휴가 날 다른 전우들이 밥 먹는 시간에 군화를 닦는다. 아침 8시에 대대장께 휴가 출발 신고를 하고 나서 군용트럭을 타고 원통으로 간다. 원통에서 갈비탕 한 그릇에 소주 두어 잔 한 뒤 서울 상봉터미널 행 버스를 탄다. 휴가 가는 많은 장병들이 저마다 들뜬 얼굴을 하고 있다. 미소가 가득하고 아침술에 얼굴이 달아오른 놈도 있다. 같은 부대 휴가자 중 선임이 나름대로 신경 써서 중간 휴게소 같은 데서 먹을 것을 사주기도 한다. 서울 도착할 즈음 한 번 더 귀대시간을 인지시키고 무슨 일 생기면 어디어디로 연락하라고 주의를 준다. 상봉터미널에 도착하면 1시 가까이 된다. 상봉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맥주를 한잔하기도 한다. 다시 강남터미널에 가면 오후 네댓 시는 넘는다. 진주로 가는 버스를 타면 6시쯤 되고 진주에는 밤 11시쯤 도착하게 된다. 부대에서 15시간은 족히 걸린다. 중간에 부모님께 휴가가고 있다는 것을 전화할 시간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안전부절 못하며 기다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불 끄고 다 잠든 심야에 대문을 쿵쿵 두드리며 어머니, 아버지를 부르던 그 순간의 짜릿한 흥분, 그것 때문에 휴가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사단 소속 문화선전대가 예하 부대를 돌며 위문공연을 펼친다. 일과를 마친 뒤 저녁 7시쯤 연병장에서 공연을 한다. 무대 설치하는 것을 본 아침부터 마음이 설렌다. 막걸리와 따뜻한 돼지고기 수육, 두부가 특별식으로 나온다. 이름난 연예인도 아니고 빼어난 미모는 아니라 하더라도 여성 가수들이 출연한다. 한두 잔에 취한 장병들은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 막춤을 추고, 그런 친구 중 몇 명은 대대장이 주는 휴가증을 받는다. 사회에서 유행하는 노래도 따라 부르고 손바닥이 벌게지도록 물개박수를 치고 그러다 보면 쏟아지는 밤하늘 별빛들도 잠시 모른 척 눈감아준다. 별것 아닌데도 기다려지고 흥겨워지는 시간이다. 군인에겐 그렇다. 무대에 올라간 장병들은 대대장에게 서로 더 잘 보이려고 온갖 기괴한 춤을 추고 목청을 높이며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 그런 일에 젬병인 나는 맨 뒤에 쪼그리고 앉아 종이컵에 담긴 막걸리 두어 잔 더 마신다. 공연이 끝난 뒤 몰려오는 허무함과 더 지독한 쓸쓸함을 이겨내려면 술만 한 약은 없다. 문화선전대는 그렇게 연중 부대를 돌며 병사들의 사기를 높여준다. 실제 그런 행사를 한 뒷날에는 아침점호 시간이 즐겁고 하루 종일 땀 흘리며 일해도 덜 피곤하다. 막걸리 힘인지, 여성 가수의 분내 탓인지, 정말 문화의 힘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대개 20살에서 23살 사이에 군대를 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군대 가는 경우도 많이 있겠지만 많은 경우 대학 다니다가 휴학한 젊은이들이다. 대학원 다니다가 늦게 입대한 사람도 있고, 심지어 결혼하여 아기를 둔 아버지도 있다. 그런 멀쩡한 대한민국 남자들이 군대에만 가면, 잘 걷기만 하면 되는 제식훈련도 잘 못하고, 장난감 같은 소총 분해 조립도 잘 못하고, 더더구나 아무렇지 않고 정상이던 정신마저 조금 이상해지게 된다. 이성, 합리, 논리, 타당성, 객관성, 철학적 이런 개념들과는 완전 결별한 채 명령, 복종, 계급, 구타 같은 말을 쉽게 받아들이고 고참, 쫄따구, 짠밥, 보급, 추진, 갈구다, 개기다, 끝선 정렬, 오와 열 같은 각종 군대말에 익숙해진다. 말은 정신이 되고 정신은 습관과 버릇을 잡아먹는다. 인간이 개조되는 건 시간문제다. 한두 번쯤은 는 누구인가, 사회에 나가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따위 고급스런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밥과 잠 앞에서는 쉽게 허물어져 버린다.

 

가령 휴가를 7일 갈 수 있었는데, 9일 가게 되면 그만큼 기분이 좋아진다. 군부대 근처에 사는 사람은 짧은 12일 휴가 동안에 여자 친구를 만날 수 있고 집안 농사일을 도울 수 있으며 아무 일 없이 정처 없이 떠돌다 귀대할 수도 있다. 귀대하는 장병들이 갖고 오는 통닭 한 마리 나눠 먹으며 모두들 군생활의 피로를 좀 풀기도 하겠지. 그렇게 하노라면, 귀한 휴가를 (연장시켜) 주신 분께 감사한 마음이 생길까. 나중에 혹시 전방에서 또 어떤 사건 사고가 생기면 전역을 미뤄두고 전우와 위기를 함께할 마음이 생길까.

 

조금 뒤집어 생각해 본다. 남과 북이 극한 대립에서 벗어나 서로 화합하고 협력하여 자유롭게 왕래하는 상황을 생각해 본다. 이산가족이 아무런 제한 없이 상시적으로 만날 수 있고, 개성공단을 드나드는 남쪽 사업가들이 별도의 절차 없이 수시로 38선을 넘을 수 있는 상황을 떠올려 본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군인은 군인이지만 조금 여유 있는 군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남북한 군 사이에는 물론이고, 아군끼리 서로 총질을 하지 않고 수류탄을 까지 않아도 되는 심리적 여유가 주어질 것이다. 지뢰 사건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영화 공동경비구역’의 앞부분 같은 장면이 현실로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군인들은 12일의 휴가보다 더 달콤하고 살맛나는 군 생활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휴가보다 평화가 더 그립고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2015. 9.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