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종이상자가 하나 눈에 띄었다. 겉에 숫자와 영어로 뭐라고 써 놓았는데, 잘 모르겠다. ‘155EA’, ‘50EA’라고 쓰인 부분에 눈길이 갔다. EA? 이게 무슨 말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 영어의 뜻을 모르지 않는다. 뭔지 모르지만 내용물이 ‘155개’, ‘50개’ 들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EA’가 ‘개’라는 뜻이겠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예전에는 한글을 잘 못 쓰는 어떤 무식한 사람이 ‘개’를 ‘EA’ 비슷하게 쓴 게 아닌가 싶었던 적도 있다. 기왕 솔직하게 말하는 김에 한 가지만 더 말해본다. 영어 ‘EA’가 왜 ‘개’를 나타내는지는 잘 몰랐다. 무식하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영어를 아주 잘할 것 같은 사람에게 물었다. ‘EA’는 ‘EACH’라는 뜻이란다. EACH는 낱개, 각각의, 제각각… 이런 뜻이란다. 그러니까 ‘50EA’는 ‘50개’라는 뜻이 맞다. 50개가 한꺼번에 뒤엉겨 있는 게 아니라 각각 따로따로 포장돼 있다는 말인가 보다. 하나 배웠다.
그건 좋다. 그러면 이 종이상자가 미국이나 영국에서 왔는가. 그건 아니다. 우리나라 어디어디에서 왔겠지. 거기는 영어가 공용어인 도시인가. 그럴 리가 있나. 그러니까 멀쩡한 우리나라 사람이 더 멀쩡한 우리나라 사람에게 종이상자를 보내면서 “이 안에는 쉰 개가 들었습니다.”라는 뜻으로 ‘50EA’라고 쓴 것이다. 참 잘하는 짓이다.
그러면 ‘EA’를 쓰는 사람이 영어를 아주 잘하는 사람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이런 포장 종이상자에 물건을 담고, 꿰매고, 옮기고 하는 사람이 영어를 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외도 있겠지만….
우리말로 ‘개’라고 쓰면 어떨까. ‘50개’라고 하면 지나가던 초등학생도 알아보지 않을까. ‘개’도 엄밀히 말하면 한자어 아닌가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영어 ‘EA’를 쓰는 것과 한글 ‘개’를 쓰는 것에 시간 차이도 거의 없다. 물론 ‘개’(個)는 한자어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시비 거는 사람에게는 더 할 말이 없다.
아무튼 하나 배웠지만, 그 뒷맛은 개운하지 않다. 찝찝하고 씁쓸하다.
(2015.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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