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신호등이다. 차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선다. 다음 신호를 기다리려면 짧으면 1분 30초 정도, 길면 3분 정도 기다린다. 한낮 진주시내의 경우 많아야 열댓 대가 줄을 서지만, 바쁜 출퇴근 시간에는 스무 대 이상이 비엔나소시지가 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에 운전자는 저마다 바쁘다. 담배 피우는 사람은 불을 붙이려 하거나 담뱃불을 끄려 할 것이다. 창문 열고 꽁초를 버리기도 한다. 가래침을 칵! 뱉는 놈도 있다. 라디오 듣는 사람은 이 채널 저 채널 돌려보기도 할 것이다. 음악에 맞춰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톡톡 치기도 하겠지. 요즘은 스마트폰을 꺼내 문자 보내고 카톡을 보내기도 할 것이다. 그 와중에 게임하는 사람도 있겠지. 간밤에 과음한 사람은 길게 하품하거나 아예 졸기도 할 것이다. 출근시간마저 데이트 시간으로 활용하는 연인 카풀족은 그 시간이 그저 고맙기도 하겠지. 저마다 1분, 또는 2~3분이 귀중하고 소중하다.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뀐다. 신호등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운전자는 어떻게 해야 하나. 파란색으로 바뀌기 전에 미리 출발하면 안 된다. 파란색으로 바뀌었는데도 엉뚱한 짓 하느라 시간을 허비해서도 안 된다. 정확하게 파란색으로 바뀐 뒤, 그래도 다른 방향에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차들은 없는지 확인하고 서서히 출발해야 한다. 다음 차가 따르고 다음 차가 따르고... 그렇게 흘러간다. 물 흐르듯이. 한 대씩 한 대씩 흘러가면 된다.
맨 앞의 운전자가 웬일인지 파란불로 바뀌었는데도 출발하지 않으면... 바로 뒤차는 어떻게 해야 하나. 빵빵 소리를 내어야 한다. 몇 초 정도 기다려줘야 할까. 망설여진다. 가만히 있자니 세 번째 차가 빵빵거릴 것 같고, 곧바로 빵빵 누르자니 오히려 운전예의도 모르는 사람같이 보일 것 같다. 짧은 순간 갈등이 인다. 두 번째 차 운전자의 갈등은 순전히 맨 앞차 운전자의 잘못이다.
길게 늘어선 뒤차, 또 뒤차, 또또 뒤차 운전자 중 누군가는 반드시 “저 새끼들 다 뭣하는 거얏!” 하며 빵빵빠앙~ 길게 누르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세 번째 이후의 차 운전자는 맨 앞차 운전자뿐만 아니라 두 번째 차 운전자도 싸잡아서 욕을 끌어 부어준다. 물론 경적소리로. 그제서야 딴 짓에서 깨어난 앞차 운전자들이 서둘러 기어를 넣고 가속페달을 밟는다. 바쁜 출근길을 애써 여유 있게 나섰던 수많은 운전자들이 침을 삼키며 욕도 삼킨다.
맨 앞에 선 차의 운전자는 나름대로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자기가 원하였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 자기 한 사람의 실수나 판단착오나 딴 짓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이 기분 좋은 아침 출근길을 잡칠지 모른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맨 앞에 선 자는 그런 임무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신호등만 뚫어져라 쳐다봐야 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신호의 흐름을 놓치면 뒤통수가 간지럽게 돼 있다.
학교 급식 줄을 설 때도, 시내버스 타는 줄을 서서도 마찬가지다. 맨 앞에 선 자는 앞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눈여겨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작은 행동 하나로 인하여 자기의 뒷사람들이 작은 혜택을 받을 수도 있고 큰 손해를 볼 수도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조직으로 치자면, 학교에서는 반장의 노릇이고 동네에서는 이장의 구실이고 지방자치단체장이 다 이와 같다고 봐도 되겠다. 시장이나 군수, 도지사가 마찬가지다. 대통령도 비슷하다. 맨 앞에 있다는 것은 뒤에 선 사람보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도 아니고, 머리가 좋다는 것도 아니고, 인격이나 인품이 뛰어나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떤 과정을 거쳤든 간에 지금 현재 맨 앞에 서 있다는 그것이 중요하다. 파란불로 바뀌면 좌우를 한 번 더 살펴본 뒤 서서히 출발하면 된다. 그러면 뒤의 모든 차들이 군소리 없이 졸졸졸 따라오게 돼 있다. 그게 그리 어려운가.
꼭 뒤차가 빵빵 해야 하고, 그 뒤차가 또 빵빵빠앙 해야 정신을 차리는가. 뒤에서 따르는 차들은 피곤하고 고달프고 짜증난다. 그래서 넓은 길로 나서면 제 정신 못 차리던 차를 잽싸게 추월해 버리는 것이다. ‘다음 신호에서는 내가 맨 앞에 서서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겠다’는 것일까.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2015.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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