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고 있지만 총동문회 체육대회가 열리는 고등학교 운동장으로 갈 마음에 이른 아침 깨어 일어나 설레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5년 남짓 할 때까지는 총동문회는커녕 동기들 모임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동기회 총무로부터 연락을 받고 매월 열리는 모임에 얼굴을 내밀게 되었다. 그렇다고 매월 꼬박꼬박 나간 건 아니다.
돌이켜 보면 동문회는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어서 동문회 말고 다른 약속이 잡히면 늘 뒷전으로 밀리곤 했다. 나 한 명 빠져도 모임에는 크게 지장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동기 모임이 제법 활성화하고 나이가 서른아홉인가 마흔인가 되던 해에 총동문회 체육대회를 주관했다. 행사 당일 나는 운동장에 나가지 못했다.
그래도 행사 기념 책자 ≪오민대≫에 실린 아인(亞人) 박종한(朴鍾漢) 선생님 인터뷰와 초창기 총동문회장 조병화 선생님 인터뷰 기사는 내가 직접 작성했다. 다시 읽어보니 군데군데 구멍이 듬성듬성 나 있는 불완전한 인터뷰이지만 우리 모두에게 조금이나마 참고자료는 될 것으로 위안 삼는다. 그 뒤로도 한 해에 평균 대여섯 번은 월례 모임에 간다.
동문회에 가면 즐겁다. 내 머리 까진 것을 놀리며 재미있어 하려는 친구들 앞에서 전혀 놀림을 당하지 않음으로써 외려 그 친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라든지, 그동안 어디에서 무엇 하며 살았는지도 모르던 옛 친구를 만나게 되는 반가움이라든지, 그저 웃으며 잔 부딪히는 소리에서조차도 기분이 황홀해지기도 했다. 아무런 부담 없이 너나들이하며 살아온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나갈 이야기들을 서로 하다 보면 생활의 지혜도 늘어나고 건강한 삶이란 어떤 것인지도 배우게 된다.
그토록 엄하게 우리를 가르치던 선생님들의 안부도 알게 되고 건강하던 선생님이 뜻밖에 일찍 돌아가셨음을 알고는 잠시 숙연해지기도 한다. 친구들 중에서도 어쩌다 한 명씩 유명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다. 부모님이나 처부모의 부음은 한 달에 한 번은 꼭 듣게 된다. 매번 조문을 못하더라도 마음으로 명복을 빌며, 그러한 일도 일상이 되는 나이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동문회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도 크다. 동문회를 자신의 사업이나 영업,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사람도 생겨난다. 그런 사람조차도 긍정적으로 봐주려고 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사업을 하겠으며 어떤 물건을 팔겠으며 정치적 성공을 이루어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또는 걱정 때문이다. 그렇지만 동문회에 와서 명함부터 돌리고 지나치게 가깝게 굴며 굽실거리려는 친구를 만나면 조금 계면쩍다.
나는, 동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업에 도움을 주거나 영업에 이익을 안겨주거나 정치인에게 투표를 하지 않으려고 많이 경계하는 편이다. 동문이 하는 식당이라고 해도 맛이 없으면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동문이 영업하는 보험이라고 해도 딴 보험사와 비교해 본 뒤 가입한다. 정치에 꿈을 둔 친구라도 그가 살아온 길, 정치적 비전, 정당 같은 것을 먼저 따져본다. 그러면서도 간혹, 동문회가 어쩌면 그러한 사람들의 사욕에 의하여 이끌려 나가는 측면은 없는지 돌아보게 되고 사업의 이익이나 정치적 목적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내세울 게 없는 나로서는 동문회에 나가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그런 생각이 깊어지면 정나미가 떨어지기도 한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인생관이 분명한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 친구들 간에도 다툼이 일어나 사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얼마 지나면 또 스스럼없이 봉합되기도 한다. 그런 것을 듣는다.
고등학교 동문회는 동문회 가운데 가장 활발하고 재미있다. 초, 중, 고, 대학교 중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한 친구들의 모임이니 그럴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문회는 아예 안 나간다. 시골 초등학교에서 시내로 전학 왔는데 두 곳에서 참가하라고 연락이 열불나게 왔다. 나는 모르쇠했다. 중학교도 마찬가지다. 우리 동기들이 주관을 맡게 됐다며 총무로부터 수차례 연락을 받았지만 나는 끝까지 함께하지 않았다. 대학교 학과 동문회는 현재 총무를 맡고 있다. 1년에 체육대회 겸 정기총회를 한 번 연다. 일일이 전화를 할 겨를이 없어 문자와 이메일로 연락하는데 졸업생 열댓 명과 재학생 간부 열댓 명, 대략 삼사십 명이 옹기종기 모여 논다.
대학교 총동문회에도 8년째 간부로 일해 왔다. 회보 편집을 맡아 왔는데 처음 몇 해처럼 열심히 하기 힘들어졌고 스스로 성의도 많이 줄어들었다 싶어 그만두기로 했다. 학교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그것도 홍보실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동문회 일을 완전히 외면하기 어려운 처지여서 그동안 버티듯 일해 왔다. 그만두기로 한 까닭은 몇 가지 더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에게 있다.
거실에 앉아 글을 쓰면서 창밖을 보니 하루 종일 어떤 하늘이 연출될지 눈에 보인다. 어제 오후에 사무국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일은 오민축제가 있는 날입니다. 올해도 변함없이 이용무 친구가 육해공의 싱싱한 먹을거리를 푸짐하게 준비할 것이니 많이 참석하여 다시 한 번 18회의 저력을 과시하고 종합우승 2연패를 달성합시다.” 그러고 보니 지지난해에 우리 동기들이 우승을 했지. 지난해에는 ‘세월호’ 사고로 인하여 행사를 취소했다. 축제라고 하는 이 날은 비가 오지 않으면 경기에 열심히 참가하고 비 오면 텐트 안에서 육해공 산해진미를 즐기고 오면 되는 것이다.
모두들 마흔아홉의 인생 굽잇길을 어떻게 넘어가고 있는지, 자식들은 공부 열심히 하며 건강하게 잘 크는지, 부모님들은 무탈하신지 물어보고 싶다. 눈가에 늘어나는 주름과 머리에 늘어나는 흰 머리카락들도 서로 바라봐주고 별 까닭 없이 씩 웃어주고 싶다. 모르지, 낮술이라도 한잔 걸치면 조용필의 ‘친구여’ 같은 노래라도 부르게 될지. 2015.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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