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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하고 소소한 일상

암행어사 출두야

by 이우기, yiwoogi 2015. 3. 24.

이몽룡은 암행어사가 되어 변학도가 학정을 벌이고 있는 남원고을에 남루한 옷차림으로 나타난다. 고을 사또의 수청을 거부한 퇴기의 딸 춘향은 변학도의 생일날 처형될 운명이다. 인근 고을 수령들이 생일잔치에 모여 금준미주(金樽美酒), 옥반가효(玉盤佳肴)에 빠져 있을 때 마패를 든 암행어사가 출두한다. “암행어사 출두야!” 이 말은, 비록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나 반란은 아니라 하더라도 부정부패를 일삼던 탐관오리의 오금을 저리게 한 것은 분명하다.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여유만만 춘향의 처형을 기다리던 수령들은 혼비백산, “걸음아 날 살려라!”하며 꽁무니를 내빼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육모방망이를 든 방자들에게 쫓겨 안방으로 건넌방으로 아래채로 달려가는 놈이 있는가 하면 화장실에 빠져 고개만 내놓고 죽을 둥 살 둥 발버둥치는 놈도 있었다. 이때, 안방인지 건넌방인지 아무튼 방 안으로 숨어들어 병풍 뒤에 몸을 감춘 한 수령이 소리치기를 문 들어온다, 바람 닫아라!”라고 했다던가 어쨌다던가.

다급한 상황이 생기면 머리에서 시작한 단어의 조합과 문장의 배열이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 입으로 쏟아져 나오게 된다. 그런 상황은 어쩌다 한 번은 생긴다. 너무 긴장하여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그러면 잘못 말한 사람은 썩은 미소를, 그 잘못 나온 말을 들은 사람은 요절복통, 즉 허리가 끊어질 듯하고 배가 아플 정도로 몹시 웃게 된다. 살아가면서 한두 번 겪으면 나름대로 추억이 되고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되기도 한다.

달걀 30개 한 판을 사서 냉장고에 넣었다. 냉장고 문에 설치된 달걀판엔 달걀 여남은 개만 넣으면 딱 맞는데, 어떤 놈은 시원하게 냉장고에 넣어주고 어떤 놈은 베란다에 방치할 수 없어 억지로 이 층 삼 층으로 쌓아올린다. 그건 오랫동안 갈고닦은 내공에 힘입어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다. 달걀은 하루에 하나 정도 먹고 어쩌다 아들과 라면을 끓여 먹을 땐 두 개를 넣는다. 햄도 달걀을 입혀 구워먹고 두부도 달걀을 입혀 구워먹고 달걀에 참치를 풀어 부쳐 먹기도 하고 대파나 양파, 버섯 따위를 종종 썰어 넣어 부쳐 먹기도 한다. 우리 집에선 없어선 안 될 중요한 먹거리이다.

아침, 바쁘다면 바쁠 때이지만 지각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걸 생각하면 그리 바쁜 시각도 아니었다.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어 국 끓이고 반찬 준비하는 아내의 등 뒤에 열려진 냉장고 문이 보였다. 물론 가지런히 쌓아놓은 달걀도 눈에 들어왔다. 자칫하면 달걀이 떨어져 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 순간 갑자기 왜 했을까. “달걀 문 닫을 때 냉장고 떨어질라!” 절체절명의 순간도 아니고 백척간두 일촉즉발의 상황도 아닌, 그저 평범한 일상에 내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년이면 지천명(知天命)이다. 그러니 뇌 속에서 단어를 만드는 기능이 많이 퇴화했을 것이고 그 단어들을 다시 문장으로 조합하는 기능은 더욱 망가져 있을 테지. 살면서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적지 않은 글을 쓰느라, 마치 자동차 바퀴가 닳고 엔진 기어가 마모되듯이 그렇게 낡고 닳고 헐거워졌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시속 40에서 시속 50로 달려야 할 운명의 세월이 재깍재깍 다가오고 있는 위기일발 상황인지도 모르지. 그러니 한 번쯤 문 들어온다, 바람 닫아라!” 하거나 달걀 문 닫을 때 냉장고 떨어질라!”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문제는 이런 일이 잦다는 데 있다. 일요일 오후 고구마를 물에 씻으며 출출하니 감자나 구워 먹을까?”라고 한다. 김치찌개를 끓이면서 오늘 된장찌개는 아마 끝내줄 거야!”라고 내뱉는다. 연속극 가족끼리 왜 이래를 할 시간에 “‘개그콘서트지금 시작하나?”라고 묻는다. 분명 자전거 뒷바퀴 바람이 빠졌는데 자전거 앞바퀴 바람 좀 넣어라.”고 한다. 무슨 글을 써서 어디에 올려놨는데 일주일이 지난 뒤에, 심지어 일 년이 지난 뒤에 다시 읽어 보니 이해하기 어려운 오탈자가 보인다. 머리에서 생각한 것을 충실히 따라야 할 입과 손이 배신을 때린 것일까. 내가 변학도인 것도 아니고 더더구나 암행어사가 출두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아니, 머릿속에 암행어사가 출두하여 큰골, 작은골 따위 것들이 혼비백산 도망가고 있는지도 모르지. 살면서 저지른 온갖 잘못된 생각, 부정적인 생각, 이기적인 생각, 나태해지려는 생각, 꼼수를 부리려는 생각들에 육모방망이를 들이대며 포박하라, 압송하라, 봉고 파직하라 외치고 있는지도 모르지. 살아오면서 좀더 넓게 보지 않고, 좀더 남을 생각하지 않고, 좀더 멀리 보지 않고, 좀더 깊이 들여다보지 않은, 얕은 지식과 천박한 논리와 해괴한 궤변에 육모방망이를 휘두르며 각성하라, 반성하라고 다그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말과 글이 제대로 되어 나오지 못하는지도 모르지. 모르지. 2015.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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