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찌개 집에 갔는데 미역줄기볶음이 밑반찬으로 나왔다. 반찬 그릇이 좀 떨어져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젓가락으로 그릇째 쓱 당겨 내 앞에 놓고 죄다 집어먹었다. 맛이 좋았다. 미역줄기를 가늘게 찢어서 참기름이나 간장 같은 양념을 적당히 버무려 볶거나 덖어 내놓는 반찬이 미역줄기볶음이다. 오독오독 졸깃졸깃 씹히는 맛이 좋은데다 칼로리가 낮고 섬유질이 풍부하여 밑반찬으로 인기가 높다. 알아보니, 식이섬유와 미네랄도 풍부해 변비와 성인병 예방에 좋다고 한다.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나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 반찬을 해 먹는 사람이 제법 많은 것을 알겠다. 요리법을 소개해 놓은 데를 보면 미역은 시장에서 살 때부터 먹기 좋게 가늘게 찢어져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바다에서 채취할 때 미역은 너비가 볶음 반찬에 알맞도록 돼 있지 않다. 넓은 건 5cm를 넘을 것이고 좁다 해도 2cm 남짓은 되지 않나 싶다. 이걸 먹기 좋도록 가늘게 찢는 일은 여간 귀찮은 노동이 아니다. 생각을 이어가다 어느새 내 기억은 30여 년 전 중학생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중앙시장에서 배추장사를 하던 어머니는 해거름이면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듯한 미역을 한 소쿠리 이고 왔다. 소금버캐가 허옇게 붙어 있는 미역은 제 맘대로 뒤엉겨 있었다. 저녁을 대충 먹은 뒤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빙 둘러앉아 미역줄기를 가늘게 찢는 일에 매달렸다. 뿌리 쪽 단단하고 굵은 부분은 아버지가 칼로 잘라냈다. 그러면서 가지런하고 얌전하게 소쿠리 시울에 착착 걸쳐 놓으면 나와 동생은 어머니를 따라 무릎에 수건을 덧대어 놓고 그 위에 비닐을 한 번 더 덮은 뒤 미역줄기를 놓고 찢어댔다.
미역을 어떻게 잘게 가지런하게 찢었을까. 처음엔 손가락으로 일일이 찢었다. 일은 늘지 않고 손가락은 아렸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영장류 아니던가. 몇 번 시행착오를 거친 뒤 아버지는 포크를 사와서 끝부분을 ㄱ자로 구부렸다. 그러고선 무릎에 놓인 미역을 좍좍 금 긋듯이 찢어대기 시작했다. 일의 능률이 올랐다. 하루 한 소쿠리를 어렵사리 해내던 것이 매일 한 소쿠리 반 이상을 가볍게 해치우게 됐다. 손을 부지런히 놀리면서도 도란도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텔레비전 연속극을 웃으면서 보기도 했다. 아버진 좀 취하면 “이까짓 게 뭐라고!”하며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행복한 시기였다고 할까.
작업이 끝나면 방구석 이곳저곳에 소금이 허옇게 흩어져 있었다. 허리가 아프고 허벅지와 장딴지엔 쥐가 내리기 일쑤였다. 중학생인 우리도 그러한데 어머니, 아버지는 어떠했을까. 어머니는 밤새 미역을 물에 담가 짠맛을 뺐다. 다음날 아침 그걸 이고 가면 얼마를 받는지 우리는 몰랐다. 장을 보러 온 아주머니들은 그 미역을 사 가서 갖가지 양념으로 맛난 반찬을 만들었겠지. 어떤 분은 미역줄기란 원래 바다에서부터 그렇게 나오는 것으로 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시절 우린 미역줄기볶음을 거의 매일 먹었다. 아침에도 먹고 저녁에도 먹었다. 점심은? 당연히 도시락 반찬으로도 단골이었다. 하루 세끼 이 반찬을 먹었다. 어떤 때는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시금해질 때까지 먹기도 했다. 음식에 물린다는 말은 이럴 때 씀 직하다. 덜 볶아 질길 때도 있었는데, 가는 줄기가 이 사이에 끼어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러니까, 미역줄기볶음은 나에겐 그다지 반가운 인연의 밑반찬이랄 수 없다.
위채엔 집주인이 살고 아래채에 세 가구가 살았는데 그중 하나이던 우리 집은 미닫이 문 하나로 연결된 방 두 개에 좁아터진 부엌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대문을 열면 바로 우리 집이었는데 대문 옆 화장실에서 나는 냄새가 늘 배어 있곤 했다. 그 냄새와 미역줄기의 짠맛이 기억 속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 같을 때도 있었다. 내가 좀 무디기에 망정이지 예민한 사춘기였다면 어쨌을까 싶다.
요즘도 어딜 가든 식당 밑반찬으로 빠지지 않는 게 미역줄기볶음이다. 식당 주인들은 시장이나 마트에 가서 가늘게 잘 찢어 먹기 좋게 가지런히 해 놓은 미역줄기를 사겠지. 그렇지만 바닷가 어민과 시장 상인 사이에, 어렵던 시절 그것을 부업으로 삼아 반찬값을 벌충하고 학용품값을 대던 우리 같은 중간 단계 사람들의 노력과 추억이 있다는 것은 거의 모를 것이다. 미역줄기 찢는 부업은 누군가 어디에선가 지금도 하고 있겠지. 어쨌든 미역줄기볶음을 보면 젓가락이 먼저 간다. 그땐 ‘이제 미역은 지겨워서 보기도 싫겠다.’ 싶었는데, 머릿속의 미각과 손가락 끝의 기억은 알량한 추억보다 훨씬 깊고 두터운 것인가 보다. 2015.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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