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했다. 아버지는 분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한 듯했지만 나는 나대로 정말 억울한 걸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뺨을 맞든지 하루 종일 꿇어앉아서라도 용서를 빌 텐데 그건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용서를 빌려면 확실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다짐해야 한다는 것을 알 만한 나이였다. 그렇게 배웠다. 중학교 3학년 5월 어느 토요일이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장난을 치면서 집으로 갔다.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은 상쾌했다. 우리들은 무슨 이야기에 넋을 빼앗긴 것일까. 그날 저녁 일을 마치고 크게 취하여 들어온 아버지는 대뜸 나를 불러 앉혀놓고는 일갈했다. “애비가 그렇게 부끄럽더나?” 영문을 모르는 나는 눈만 깜빡였다. “그래, 친구들과 지나가면서 노가다하는 애비를 보고도 모르는 척하는 건 어데서 배워 먹었노?”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한참 뒤에 알게 된 건, 그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할 때 아버지는 근처 공사장에서 등짐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고 있었는데, 마침 아들과 친구들이 지나가기에 불러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주려 했는데,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모른 척하고 고개를 돌려버리더라는 것이다.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아버지는 시골에서 소작 부쳐봤자 아들들 키우기에 글렀다며 진주로 이사했다. 막상 진주로 이사했지만 먹고 살 길이 막막하긴 마찬가지였다. 연탄보일러 수리하는 일을 배웠다. 연탄보일러에 대해서만큼은 장인으로 대접받아도 모자랄 정도로 기술을 익혔다. 그러나 연탄보일러 수리는 찬바람 불 때부터 꽃 피고 새 우는 봄까지만 밥벌이가 되었지 날이 따뜻해지면 일거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공사장을 전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정말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후줄근한 작업복 차림으로 낡은 짐바리 자전거를 끌고 새벽같이 나갔다가 캄캄해져야만 불콰하게 취하여 돌아오는 아버지를 자랑스럽다고 생각한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은 맹세코 없었던 것이다. 친구들과 재잘거리느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풍경을 자세히 보지 않았던 것일까. “나뿐놈. 내가 너를 그리 키웠더나!” 오해라고 애원해봐야 소용없을 한마디였다. 그 말은 가슴에 콱 박혔다. 가슴속에 멍울이 생겼다. 막막했다. 난생 처음 아버지가 무서워졌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넓고 깊은 강이 생겨버렸다.
아버지는 아들 넷 가운데 셋째인 나에게 많은 애정을 쏟았던 것 같다. 못 배운 당신의 한을 풀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일까. 시골 삶을 청산하고 도시로 이사한 것도 사실은, “저 놈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짐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중학교 성적표는 예순 댓 명 가운데 삼십 등을 겨우 유지했고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이 아슬아슬할 정도였다. 미안해하거나 기가 죽을까봐 아무렇지 않은 듯 나를 대하여오던 아버지는, 그날 기어이 속에 든 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나는 울었다. 서럽게 울었다. 미안한 마음과 억울한 마음이 뒤엉킨 실타래가 되어 뜨거운 눈물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그러고서 나는 더욱 말없는 학생이 되었고 말 잘 듣는 아들이 되었다. 아버지를 화나게 한 그날의 진실은 뭐였을까. 며칠 지나자 아버지는 그날의 분노와 서운함을 잊어버린 듯했다. 더 힘들고 화나는 일은 집 밖에 널려 있었으므로 아들에 대한 감정은 잠시 덮어둔 것이었을까. 턱걸이로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고 네 형제 중 처음으로 대학 문턱을 밟은 나는 아버지가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을 것이다.
대학생이 된 나는 다시 아버지의 기대를 배반했다. 시대가 우리를 배반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대학생인 나는 아버지가 바라 마지않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길을 걸었다. 새벽까지 마신 날은 대문을 열자마자 마당에다 구토를 했고 최루가스 냄새를 미처 털어내지도 못한 채 이불 속으로 스며들었다. “데모 하면 안 된다!” 짧은 한마디에 나는 수백 단어를 내뱉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보지 않고 그냥 기성세대로 본 것이다. 아버지가 찍겠다는 후보와 내가 당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후보는 단 한 번도 일치되지 못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논쟁을 벌였다. 아니다. 그건 논쟁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인생이라는 강의 깊이와 넓이를 가르치고 있었고 아들은 막무가내로 대들고 있는 것이었다. “니가 세상을 알모 울매나 아노?”라며 찍어 눌렀고, “알 만큼은 압니더.”라며 대거리를 했다. “뺄갱이 될래?”라는 고함도 터졌다. 기대는 지리산보다 크고 높았는데 아들은 인생의 샛길에서 방황하는 때늦은 사춘기를 겪고 있는 것이었을까. 아버지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어린 시절 느끼던 애정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엇나가버린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방치한 당신 자신에 대한 원망이 그렁그렁했다. 아버지는 담배를 뻑뻑 빨아댔다. 아들은 아버지의 눈길을 피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라는 인사말이 호강스러운 날도 있었다. 그러고서 스무 해가 넘는 강물이 흘러갔다.
아버지는 서울 아산병원에서 폐암 진단을 받았다. 검사 받는 사흘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아버지는 온몸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사흘 동안 모시던 동생이 진주로 내려가고 뒤에 사흘 동안 내가 병실을 지켰다. 담배가 간절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병원 안팎 어디에도 담배 피울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밍밍한 병원 밥을 몇 숟갈 억지로 넘기긴 했지만 가장 당기는 반찬은 담배였을 것이다. 닷새째 점심 후 퇴원수속을 하고 짐을 챙겨 주차장으로 갔다. “잠깐만!” 아버지는 차를 타지 않고 우물쭈물하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 불을 댕겼다. ‘폐암에 가장 나쁜 게 담배인데, 병원을 나서자마자 다시 담배라니….’ 하는 생각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단 둘이 진주까지 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모든 낱말은 허공에서 버석거렸고, 앞으로 닥쳐올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이겨나갈지 생각하느라 마주이야기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시간이었다. 흘러가기만 하는 강물 같은 시간이었다.
대학병원에서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일반병실과 경남지역암센터 암병동을 오가며 기나긴 싸움을 이어나갔다. 병실이 없을 때는 진주의료원으로 갔다. 아버지는 항암제 링거를 들고 암병동 앞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담당 의사도 “어차피 호전되기는 어려우니 담배를 피워도 좋다.”고 말한 것 같았다. 어머니는 담배를 사 날랐다. 다른 형제도 폐암환자인 아버지의 흡연을, 마지못해서이긴 하겠지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기적이라는 말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마지막까지 힘겨운 투병을 하면서 담배를 피운다는 게 말이 되는가 싶어 아버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끌려 나가다시피 암병동 앞으로 나가 아버지 옆에 선 나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속으로 ‘제발, 제발!’을 외쳤다. 담배 연기 한 가닥이 곧 암세포 하나로 보였다.
진주의료원 5층 2인실에 혼자 입원해 있을 때다. 금요일이어서 어머니 대신 내가 잠을 자기로 한 날이다. 수시로 드나드는 간호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새벽 4시쯤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어디에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나는, 몸을 비틀어 침대 바깥쪽으로 바짝 붙이고 서랍에 있던 담배를 끄집어내기 위해 오른손을 힘껏 쭉 뻗어 끙끙거리며 안간힘을 쓰는 아버지의 눈빛과 눈이 마주쳤다. ‘절대 금연’을 주장하는 아들이 잠든 것을 틈타 서랍 속 담배를 꺼내려고 한 것이다. 링거 줄은 팽팽해져 있었다. 아버지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그것은 삶을 향한 맹렬한 불꽃이었다. 그것은 칠십 년 넘게 포개지고 덧칠되어 절대 벗겨질 수 없는 오롯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아! 스무 살도 되기 전부터 피우기 시작한 담배를 일흔일곱이 되어 끊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에 콱 박혔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폐암이라고 하더라도, 아니 폐암보다 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예순 해 가까이 날마다 애지중지 즐겨온 담배를 못 피우도록 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게 아버지의 인생이요 삶이었던 것이다. 나는 말없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드렸다. 다음날 아침을 먹은 뒤 아버지를 모시고 진주의료원 1층 바깥으로 나가 나란히 선 채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 담배를 태우니 좋습니꺼?” “좋다, 참 좋다. 하늘을 나는 것 같다. 살 것 같다.” “그럼 한 대 더 하실랍니꺼?” “아니다, 됐다. 들어가자.” 아버지는 평화로웠고 여유로웠다.
아버지는 폐암 진단 후 11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당신이 그리워 산소에 가면 먼저 상석 틈에 담배 한 개비를 끼워 넣고 불을 붙인다. 담배는 잘 탄다. 연기는 바람에 흩어진다. 재가 되고 연기가 되고 말 인생을 왜 그토록 빡빡하게 걸어온 것일까. 등짐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리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모른 척 외면한 아들을 용서할 수 없었던 아버지에게, 짐짓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한마디만 했더라면 어땠을까. “누가 대통령이 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 아버지, 어머니만 건강하시면 됩니다.”라는 말을 청춘의 나는 왜 할 줄 몰랐을까. 강퍅한 인생의 강을 어렵고 조심스럽게 건너가던 아버지에게, 더 배운 내가 옳다고 억지 부리면서 대거리할 필요가 정말 있었을까. 마음속 화해의 손짓을 결국 말로써 전하지 못한 이 어리석음과 불효를 어떻게 해야 할까. 2014.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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