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라는 말을 처음엔 ‘가래’로 들었다. 1986년 대학 1학년 때이다. 모꼬지(엠티)를 가는데 조별로 무슨 음식을 해 먹을 것인가를 정하는 자리에서 ‘카레’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오뚜기 3분카레’라는 게 있을 때였는데도, 태어나서 무려 20년 만에 처음으로 인도음식으로 알려진 이것을 먹어보게 된 것이다. 하동 송림 백사장으로 간 우리들은 부지런히 재료를 다듬고 볶고 끓이고 하여 카레를 완성했다. 꼭 어떤 맛이라고 말하기 애매한 카레는, 코를 강하게 자극하기는 했지만 입에 넣기는 조심스러웠다. 첫 만남은 좀 어색했다고 할까.
그 뒤 이러저러한 자리에서 카레를 자주 먹어보게 되었고, 점점 그 오묘한 맛에 빠져들었다. 약간 매콤한가 하면 고소하고 그런가 하면 달착지근하고 뒷맛은 개운한데 한참 동안 몸에서 냄새가 가시지 않는 카레만의 매력(카레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에 빠져들었다. 3분 카레 같은 것도 곧잘 사먹었다. 여행 갈 때는 빼놓지 않고 챙겼다. 친구들 자취방에서도 간단히 해먹었다. 밥과 먹으면 반찬인데 소주 한잔을 곁들이면 안주로도 손색없다.
우선 노란빛깔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개나리나 해바라기 빛깔 같은 카레의 노란 빛깔을 본 순간 뇌는 침샘을 자극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쓰던 고무지우개만한 크기로 썬 감자와 당근도 먹음직스럽다. 숟가락으로 뜨든 젓가락으로 집든, 포크로 찍든 입을 그리 크게 벌리지 않아도 맞춤하게 입속으로 쏙 들어가게 생긴 그것들은 카레를 먹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퍼석하지도 않고 서걱거리지도 않게 잘 익은 감자와 당근은 모서리도 동글동글하게 다듬어져 눈마저 즐겁게 해 준다.
고기도 필수다. 돼지고기 또는 소고기 또는 닭고기를 쓴다. 고기는 도톰하고 예쁘게 썰어 넣는다. 미리 달달 볶을 때 후춧가루나 소금을 간하여 고기 자체가 싱겁지 않도록 하는 게 포인트인 것 같다. 질기지 않게 잘 익히는 것도 기술이다. 오징어를 넣기도 하고 단호박이나 고구마, 파프리카를 넣어 먹기도 한다. 재료가 잘 익었을 때 카레를 넣는데 여러 가지 재료의 독특한 맛과 향, 그리고 모양까지 그대로 살아나도록 잘 저어주어야 한다. 양파는 흐물흐물 국물인지 건더기인지 모르게 된다. 양파의 희생은 값지다고 할까.
결혼 후에는 주로 닭고기를 넣은 카레를 먹은 것 같다. 쉬는 날 부지런히 재료를 준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하는 아내의 솜씨가 돋보인다. 난 왔다 갔다 하며 감자를 깎아주고 중간 중간 간 봐주는 역할을 한다. 넓적한 국그릇에 밥을 양껏 푸고 국자로 카레를 듬뿍 떠서 밥을 완전히 덮은 뒤 슥슥 비벼 먹는 맛은 가히 일품이다. 맛의 황홀함의 경지에 다다른다고 할까. 그럴 때면 보통 때보다 과식하게 된다. 온 집안에 카레 향기가 배어 있어도 싫은 줄 모르겠다. 그런데도 그렇게 자주 해 먹지 못하는 건, 정말 희한하게도 중2 아들은 카레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녀석도 대학생쯤 되어야 카레의 깊고 넓은, 그 오묘한 맛을 깨닫게 될는지.
카레를 먹으면 한 번씩 생각해 보게 된다. 감자와 당근이 제 빛깔과 모양 그리고 맛까지 잃지 않으면서도 카레와 잘 버무려져 섞이듯, 그렇게 세상과 어울리며 잘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된다. 고기를 볶을 때 소금과 후춧가루를 미리 뿌려주듯 매사를 제대로 준비하며 일해 왔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양파의 희생도 생각난다. 한 끼 요리를 할 때도 재료가 알뜰하고 정성이 살뜰해야 제대로 된 맛이 난다는 평범한 진리를 배운다. 카레를 먹은 뒤 그 짙은 향기가 몸에 배어 오랫동안 달아나지 않듯 사람을 만날 때 나만의 인간미(人間味)가 그 사람에게 오랫동안 남겨져 있었을지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을지 되돌아보게 된다. 딴 사람이 나를 반찬으로도 생각하고 안주로도 생각하도록 먼저 배려하고 희생하며 도와가면서 살아왔는지도 차분히 생각해 보게 된다.
옅은 구름이 햇빛을 가린, 한 해의 마지막 일요일 오후 문득 카레가 먹고 싶어진다. 재료가 다 갖춰져 있지는 않지만 3분 요리가 아주 잘 나와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2014.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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