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담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삶에서 얻은 경험과 교훈, 어떠한 가치에 대한 견해를 간결하고도 형상적인 언어 형식으로 표현한 말이다. 주로 하나의 완결된 문장의 형태를 띠며 다양한 종류의 수사법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표현의 함축성과 세련성을 잘 보여 준다. 수십 마디 말로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하나의 속담이 상황을 더 잘 설명하거나 묘사해 주는 경우가 많다. ‘티끌 모아 태산’은 절약과 노력의 중요성을 함축하여 보여준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어릴 적부터 인성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명하게 설명한다. 속담은 오랜 세월 동안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면서 표현상으로는 세련되게 다듬어지고, 내용적으로는 많은 사람의 지혜가 담기게 된다. 그래서 속담은 우리의 언어생활을 풍부하게 해주며 교육적 효과까지 가지게 된다.
하지만 속담은 바로 그러한 속성으로 인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말로 전락하기도 한다. 한때는 어떤 상황을 아주 적절하게 포착한 것처럼 잘 쓰이던 속담이 후세에 와서는 시의적절하지 못한 말로 취급당하거나 아예 써서는 안 되는 말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삶은 왕조 중심의 봉건사회에서 자유 민주주의 시대로 이동해왔고 가족 중심의 자급자족 1차 산업 시대에서 최첨단 과학문명 사회, 신자유주의 시대로 이동해 왔는데 속담은 이런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때문이다.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도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바뀌어 왔다. 어쩌면 사회변화를 부지런히 잘 따라간다면 그건 속담이 아닐지도 모른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있(었)다. ‘있(었)다’라고 쓰는 데는 까닭이 있다. 100년 전쯤 이 속담은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을 것이다. 남성중심 사회인 조선시대에 여성은 인격적 대접을 받기 어려웠다. 정치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남성들이 정치하는 데 대해 여성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을 섞지 말라는 뜻이다. 집안에서 남성보다 여성이 더 권위 있게 행동하려 했다간 집안을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없다는 말이었다. 여성을 억압하는 대표적인 속담이다. 이 속담을 10~20년 전쯤에 물색없이 들먹였다간 눈총깨나 받았을 것이다. 요즘은 이 속담 전체를 말하기는커녕 ‘암탉’이라는 말조차 조심스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이 속담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하기 어렵게 됐다. 세상이 그만큼 변했다는 뜻이고 상대적으로 여성들의 지위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뜻이다. 이 속담 탓에 상당한 기간 동안 여성들이 고개를 숙이고 살았을지 누가 알겠는가. 어릴 때부터 이 속담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여성들이 과연 성인이 되어서도 자아를 실현하며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겠는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이 있다. 어떤 수단이나 방법으로라도 목적만 이루면 된다는 말이다. 교통이 불편하여 서울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질 때, 버스를 타고 가든 기차를 타고 가든 비행기를 이용하든 어떻든 서울만 가면 되는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 말은 참 비겁하고 사납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도 정당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누가 보더라도, 몇 십 년 몇 백 년이 지나더라도 그 정당성과 합리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권을 잡기 위해 수백, 수천 국민을 학살하면 안 된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절차를 어기고 법을 뛰어넘어 아무렇게나 판단하고 결정하여서는 안 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게 아니라, 적어도 생각이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서울 가려면 모로 가지 말고 정도로 가라고 해야 한다. 이 속담 때문에 결과가 과정을 무조건 정당화하는 가치전도(價値顚倒) 현상이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는지 모른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속담이 있다. 개같이 버는 건 어떻게 버는 것일까. 개한테 좀 미안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자. 음식에 넣어서는 안 되는 화학물질을 넣고 비위생적으로 제조하여 함량도 모자란 먹거리를 파는 기업가. 노동자 권리는 안중에 없이 기업의 이윤만 추구하며 노조를 탄압하는 기업가. 개발 정보를 빼내기 위해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는 투기꾼. 더 큰 이권을 챙기기 위해 정치권에 차떼기로 뇌물을 갖다 바치는 재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개같이 버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날치기, 아리랑치기, 들치기, 소매치기, 사기꾼, 날강도도 개같이 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벌어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게 번 사람들이 정승같이 쓸 수 있을 리 없다. 십중팔구는 제 자식 대대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먹고살기에만 몰두할 것이고, 정말 우리 사회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정승처럼 쓰지는 않을 것이다. 개같이 번 사람은 절대 정승같이 쓸 수 없다. 정승같이 쓰기 위해서는, 비록 몇 푼 안 되는 돈이라 하더라도, 정승같이 벌어야 하는 것이다. 정승같이 벌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사나 참판처럼 벌면 또 어때? 이 속담을 보면 우리 겨레에 정말 개같이 돈 버는 사람이 많(았)음을 알겠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다. 윗사람이 근엄하게 뭐라고 하실 때 불쑥불쑥 질문을 던지지 말라는 말이다. 다들 ‘앞으로 나란히’ 하면 그냥 앞으로 나란히 하라는 말이다. 모두 “예” 할 땐, 몰라도 그냥 대충 알아서 “예”라고 말하란 뜻이다. 위에서 시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남들 앞으로 가는데 혼자 뒤돌아가거나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속담이다. 그러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다며 은연중 협박하는 것 같다. 이 속담은 독재정권 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청년들에게 부모세대가 자주 해주던 말이다. 이 속담을 듣고 자란 사람이 자기 주장, 자기 의견, 자기 논리, 자기 생각을 갖고 살기란 얼마나 어려울까 싶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라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해도 안 될 일을 위해 헛심 쓰지 말라는 속담이다. 불가능하고 무모해 보이며 도저히 승산이 없는 경우에 쓰는 말이다. 실제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려면 도대체 계란 몇 개가 있어야 할까. 이 속담은, 아주 많은 경우에, 거대한 권력과 자본을 가진 자가 그에 대항하는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 장애인들의 투쟁을 비하하고 무시할 때 곧잘 쓴다. 역시 민주화 운동하는 청년에게 부모세대들이 하던 말 가운데 하나다. “아무리 그래봤자 계란으로 바위치기이니 잠자코 살아라.”라고 말하곤 했다. 과연 그런가. 영화 ‘변호인’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바위는 죽은 것이지만, 계란은 살아서 바위를 넘는다.” 긴 말이 필요 없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바위는 반드시 부서질 수밖에 없다. 계란은 무수히 많고 살아 있고 던지기에 딱 좋은 크기이지만, 바위는 무식하게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무생물일 뿐이다. 누가 이길는지 생각해 보나마나다.
‘인부족 세부족’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 숫자도 모자라고 세력도 모자란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하고, 하라는 대로 따르라는 말이다. 독재 권력에 대항하여 민주화 운동을 하는 자식들에게 부모들은 “인부족 세부족이다. 그냥 참아라.”라며 설득했다. 패배주의를 심어주는 말이다. 인부족 세부족이니 더 많이 모이고 더 크게 단결하고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더 치밀하게 싸우라고 말하는 어른은 별로 없었다.
‘못 생긴 며느리 제삿날 병 난다.’, ‘저녁 굶은 시어미 상’, ‘처삼촌 묘 벌초 하듯 한다.’는 속담들도 특정 부류의 사람을 비하하거나 인격적 모독을 안겨준다. 이런 속담이 자주 회자되다 보면 전통적 가족관계를 파괴할지도 모른다. ‘귀머거리 삼 년이요, 벙어리 삼 년이라.’는 속담도 과거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옥죄던 말이다. 시집 간 며느리가 3년 동안 들어도 못 들은 척, 할 말이 있어도 없는 척하며 지내야만 비로소 시댁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는 말이니 얼마나 가혹한가. 시어머니의 입장만 두둔하는 낡은 관념이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속담도 오늘날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속담들이다. 그런데 이런 속담 대부분은 여성들 스스로 여성을 비하하여 사용한 것이라 하니,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적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많은 속담은 우리 조상들의 삶 속에서 오랫동안 다듬어지고 윤색되고 포장되면서 지혜와 용기, 그리고 관용과 같은 미덕을 담고 있다. ‘속담에는 그 민족의 특성이나 정신, 생활양식 등이 반영되어 있어 한 민족의 역사나 종교, 풍속, 사회구조 등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권순우 편역 ≪한 권으로 읽는 한국의 속담≫ 13쪽)고 했다. 그런데 그 속에, 누렇게 잘 익은 가을 들판의 벼논에 듬성듬성 섞여 있는 피처럼, 양반계급과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릇을 하는 못된 속담이 섞여 있다. 여성을 비하하고 특정 직업인의 인격을 모독하는 속담들이 제법 섞여 있다. 우선 생각나는 몇 가지를 적어 봤는데 찾아보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 속담은 우리 삶을 지혜롭게 하고 웃음 짓게 하기보다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짜부라뜨리고 상상의 날개를 꺾어버리고, 그리하여 체제에 순응하기만 하는 순치(馴致)된 인간을 만들 뿐이다. 2014.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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