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노래방에서 그나마 체면치레라도 하게 해준 분들

by 이우기, yiwoogi 2014. 12. 16.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은 여선생님이었다. 당시 결혼을 했었는지 안 했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보다는 꽤 엄하고 야무진 선생님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음악 시간이었다. 가사에 희고 노란 꽃나비 봄바람 타고서.” 어쩌고저쩌고 하는 동요가 있었다. 제목은 기억에 없다. 인터넷에 물어보니 원치호 작시, 권길상 작곡의 나비노래라고 한다. 선생님은 교실 앞에서 풍금을 타면서 한 소절씩 계명으로 부르고 우리를 따라 부르게 했다. 우리는 입을 모아 열심히 따라 불렀다. 그러고는 가사를 한 소절씩 따라 부르게 했다. 우리는 선생님의 입을 따라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몇 번 그러더니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누가 영감 흉내를 내느냐? 장난치지 마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영문을 모르는 눈치들을 했다. 다시 한 소절 시켜보더니 선생님은 약간 화난 표정으로 영감 목소리 내는 놈이 누구냐!”고 소리를 질렀다. 여전히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선생님은 내가 있는 일 분단 쪽을 노려보았다. 괜히 움찔했다. 앞에서 세 줄까지 여섯 놈을 일어서라고 하더니 따로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다. 우리는 우물쭈물하면서, 갑자기 무슨 죄인이 된 듯 노래를 불렀다. 죄인이 노래라니.

선생님은 영감 목소리를 내는 장본인을 기어이 찾아내었다. 흥겨워야 할 음악 시간을 짜증나고 무미건조한 시간으로 만들어버린 장본인은 바로 나였다.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불렀는데, 선생님은 음정도 박자도 맞지 않고 심지어 영감 소리를 내어 도무지 듣고 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장난 아니냐며 몇 번이나 불러보라고 했다. 예순 명쯤 되는 반 친구들이 일제히 내 입만 바라보았다. 부끄러웠다. 좀 억울했지만 선생님이 시키니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울고 싶었고 도망가고 싶었다. 선생님은 그날 그 음악 시간을 잊어버렸겠지만 내게는 그 장면이 화석처럼 가슴에 새겨졌다. 그 후 노래를 잘 부르지 않게 되었다.

대학 다닐 때 막걸리 집에서 친구들과 젓가락 장단을 두드리면서도 나는 내 목소리가 좀 튀지나 않는지, 음정과 박자를 제대로 맞추는지 늘 신경이 쓰였다.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할 경우가 생기면 무슨 핑계를 대어서라도 모면하곤 했다. 직장생활 할 때 노래방이라는 게 생겼는데 일부러 고함을 빽빽 지르는 노래를 선곡했다. 영감 소리가 감춰질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윤도현의 타잔은 그래서 애창곡이 된 경우이다. 아니면 아예 음정이나 박자가 무난한 옛 노래를 선택했다. 나훈아의 가지 마오’, 박일남의 갈대의 순정은 그래서 자주 부르게 되었다.

동료들은 그러한 노력을 눈치 챘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다. 나와 함께 노래방에 한두 번 가 본 사람은 변하지 않는 레퍼토리에 질색했을 법한데도 내색하지 않았다. 요즘 노래는 아예 부르지 않고 정말 고색창연한 구닥다리 옛 노래만 불러도 즐거이 박수쳐 주었다. 술기운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고마운 사람들이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 그 음악 시간은 허물어지지 않는 성벽처럼, 물러지지 않는 호두처럼, 흐릿해지지 않는 매직처럼 뚜렷하고 무서운 기억으로 평생 동안 따라다니고 있다. 그 기억을 지워보려고 짐짓 아무도 시키지 않는데도 벌떡 일어나 노래를 불러본 적도 있다. 미친놈 소리 안 들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술의 힘을 빌려 아파트 마당을 지나며 고래고래 노래 불러본 적도 있다. 하지만 희고 노란 꽃나비 봄바람 타고서라는 가사가 나도 모르게 딱 떠오르고 멈칫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4학년이던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들을 흥얼거리며 그 음정과 박자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초등학생이 감동해야 할 동요와는 사뭇 다른 음악 세계에 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것은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준 유산인지도 모르겠다. 동요를 트로트로 편곡하여 불렀으니.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선생님 덕분에 그나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노래를 어찌어찌 찾아내어 노래방에서 그나마 체면치레라도 하고 사는 것 아닌가 싶다. 모두 고마운 분들이다. 2014. 12. 16.

'그 석류나무 잎사귀는 몇 장이었을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속담 몇 가지  (0) 2014.12.25
‘상’이라는 말의 품격  (0) 2014.12.23
김장  (0) 2014.12.14
고구마  (0) 2014.12.12
상식  (0) 2014.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