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집 겨우내 먹고 여름엔 고등어묵은지찜 또는 묵은지갈비찜이라도 해 먹으려면 넉넉하게 마련해야 했다. 시어머니와 네 며느리가 모여 김장을 했다. 미리 배추를 집까지 옮기고 다듬고 자르고 절이는 일은 어머니, 아버지가 다 했다. 온가족이 모두 모이는 날은 양념을 치대는 날이었다. 며느리들은 새벽같이 달려갔고, 아들들은 느지막이 당도하였다. 좁다란 마당에서 오밀조밀 모여 벌겋고 매콤한 양념을 풀죽은 배추에 비비고 치대는 다섯 아낙의 모습은 흑백그림으로 머릿속에 아련히 남았다.
아버지는 돼지고기를 삶았다. 전날 미리 사놓은 큼지막한 돼지고기를 큰 솥에 넣고 된장 조금, 소금 조금 더 넣어 오랫동안 삶았다. 한 시간은 더 삶은 것 같다. 돼지냄새가 초겨울 햇살의 주린 배를 놀릴 즈음 우리는 도착했고, “와 이리 늦게 오노!”라며 지청구 한마디 꼭 빼놓지 않는 아버지는 그제서야 고기를 건져낸다. 냉장고를 열면 막걸리 서너 병과 소주 너덧 병이 줄지어 서 있고 부엌 한쪽엔 도톰하고 먹음직스런 굴이 얌전하고 예쁘게 씻어져 있다.
바깥에선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이 막바지 김장을 하느라 정신없는데 거실에선 ‘오부자’(五父子)가 술타령에 빠져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김치로 수육을 큼직하게 싸서 오른손에 들고 소주 한 잔을 왼손에 받쳐 들고선 마당에서 고생하는 어머니께 형수님께 제수씨께로 향한다. 잠시 뒤 온가족이 마당에 비좁게 비집고 앉아 웃음꽃을 피우며 한잔씩들 하고, 여기저기 묻은 고추장 양념을 씻어내며 길게 기지개를 켜면 김장은 끝난다. 다 만든 김치는 김치 통에 넣어 차곡차곡 쌓았다.
아버지는 꼭 한마디 한다. “돼지가 잘 삶겼네, 못 삶겼네, 김치가 짜네, 맵네, 싱겁네, 밍밍하네….” 한 번에 “맛있다.”고 한 적은 기억에 없다. 그래도 늘 그렇게 미리 굴을 사고 돼지고기를 삶고 막걸리, 소주를 냉장고에 넣어놓곤 했다. 김치는 일 년 내도록 그냥 김치로 밥상에 올라 떨어진 입맛을 돋우어 주었고, 실력이 형편없는 나도 김치만 믿고 김치찌개를 끓여도 되도록 해 주었다. 어머니는 “다들 바쁘니 그냥 알아서 할란다. 미리 김치 통 갖다 주고 나중에 와서 김치나 챙겨 가라.”고 하시며 동네 아지매, 할매들과 김장을 할 때가 더 많았다. 김치를 갖다 먹는 우리들은 미안했다.
올해는 아예 김장을 하지 않았다. 며느리들이 각자 어찌어찌 알아서 담근 김치를 한두 통씩 어머니 집 김치 냉장고에 갖다 넣어 놓는다. 어머니는 아무것이나 마음에 드는 것을 꺼내어 드시면 된다. 우리는 집에서 스스로 김장할 재간이 없다. 마침 처가에 갔더니 장모님이 우리 몫을 챙겨 놨다. 조금도 도와드리지 못한 죄스러움과 미안함을 애써 감추고 웃으며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라며 싣고 왔다.
수육을 삶았다. 여러 식구들이 모여 왁자지껄 떠들면서 먹는 재미나 맛은 없지만, 장모님 사랑과 미리 수육을 준비한 아내의 배려를 먹는다. 잘 삶은 돼지고기를 얇게 썰어 쭉쭉 찢은 김치에 얹어 입을 크게 벌려 한 입 먹어 본다. 눈물이 난다. 과일주 한 잔에 얼음 몇 개 띄워 뜨겁게 달아오르는 목울대를 식혀보려 하지만 더 뜨거워지기만 할 뿐, 김장이란 말 하나에 묻어 있는 많은 추억과 사연을 씻어내지는 못한다. 2014.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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